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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56
한자 桐津戍
영어공식명칭 Dongjins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시설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고려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시설

[정의]

고려시대 삼척 지역에 설치한 군사 시설.

[개설]

고려시대 삼척 지역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군사 시설로 동진수가 있었다. 이 밖에 임원수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고려 전기에 설치된 것으로, 동여진의 잦은 침략에 대비한 군사 시설이었다.

[건립 경위]

고려시대 삼척현에도 수소(戍所)가 있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따르면 삼척 지역에 위치한 수소로 동진수(桐津戍)와 임원수(臨遠戍)가 있었다. 이 가운데 동진수는 1036년(정종 2)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036년 2월에 동번(東蕃), 즉 동여진이 삼척현동진수를 침략하여 주민들을 노략질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당시 동진수를 지키던 장수는 매복을 하였다가 퇴각하는 적을 공격하여 40여 명을 사로잡거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동진수는 1036년 이전에 동여진의 잦은 침입에 대비한 군사시설로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진수가 삼척 지역 바닷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한편 임원수는 1052년(문종 6)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역시 동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여 설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1052년 6월에 동여진의 고지문(高之問) 군대가 삼척현 임원진을 공격하자 수장(守將) 하주려(河周呂)가 격퇴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당시 하주려는 마침 관할 수소를 순행하던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판관(判官) 김숭정(金崇鼎)의 간접 지원에 힘입어 적군 10여 명을 사로잡거나 목을 베었다.

이를 보면 임원수는 1052년 이전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주려가 적을 격퇴할 수 있도록 지원한 안변도호부 판관 김숭정은 당시 분도제(分道制) 아래에서 삼척현이 속한 분도(分道)의 분도장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계(東界)에는 5~6개의 분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분도장군은 안변도호부의 판관이나 녹사(錄事) 등이 겸하였다.

[변천]

동진수와 임원수가 언제까지 존재하면서 군사 시설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특히 공민왕대와 우왕대까지 존재하면서 당시 삼척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데 중추 역할을 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우왕대에 들어와 왜구로부터의 피해가 극심해지자 수소의 취약점을 보완 내지 해결하기 위하여, 즉 수소를 통과한 왜구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려는 차원에서 1377년(우왕 3)부터 축성(築城)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삼척 지역에서도 1384년(우왕 10)에 오화리산성이 축조되고, 1386년(우왕 12)에는 당시 삼척군 지군사(知郡事) 남은(南誾)[1354~1398]이 읍성을 쌓았다.

[구성]

일찍이 방어소(防禦所)·방호소(防護所)로도 불린 수(戍) 또는 수소는 고려 전기에도 있었다. 고려 전기 수소는 접적(接敵) 지역 또는 적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양계(兩界) 지역에 설치되었다. 동계의 경우 최북경(最北境) 지역과 동해안 지역에 설치되었다. 특히 동해안에 설치된 수소는 동여진의 잦은 침입에 대비한 군사시설이었다.

고려 전기 수소는 본성(本城)인 주진성(州鎭城)과 연계된 방어 보조 시설, 즉 전방 초소였다. 이처럼 수소가 주진(州鎭)의 전방 초소와 같은 보루(堡壘)인 만큼 적군 동태를 탐지하여 그 정보를 본진(本鎭)에 통보하거나 적의 소규모 침입을 격퇴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에 따라서 수소는 수십 칸 정도의 성책(城柵)이었고, 본진에서 파견되었을 주둔군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수소의 지휘관과 군사는 모두 수소가 위치한 지역에서 충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수소는 충정왕대 이후 왜구 방어를 위해 점차 연해 요충지로의 설치를 증가시켜 갔다. 즉 왜구 방어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연해 요충지에 수소를 집중 설치한 것이었다. 공민왕대 수소는 초가와 나무 울타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에 따라서 수소는 인근 주민들의 피란처로 사용될 수 없었다. 오직 군사들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뿐이었다. 수소의 설치 간격은 먼 경우가 50~60리였고, 가까운 경우는 20~30리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수소는 고려 전기와 달리 주변의 성들과 연계되지 않은 채 그 자체로만 존립하였다. 수소 지휘관도 관인들 가운데에서 파견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고, 군사도 당해 지역이 아닌 광대한 영역에서 징발되어 충원되었다. 이러한 수소는 공민왕대와 우왕대 초반의 왜구 침입 때 방어 시설로서 중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왜구 방어의 최선책은 연해 지역 주민들을 내지로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주민들을 옮긴 후 연해 지역 방어는 수소를 방어처로 한 수졸에 의해 이루어졌다.

[현황]

동진수가 현 삼척 지방 어디에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임원수는 지금의 삼척시 임원 지역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고려 전기 삼척 지역은 동여진의 잦은 침략을 받았고, 이에 대비한 군사 시설로 2개의 수가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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