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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45
한자 金渭翁
영어공식명칭 Kim Wi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840년(헌종 6) - 망제단과 비를 세워 매년 실직군왕릉에 제를 지내기 시작함
묘소|단소 실직군왕릉 - 강원도 삼척시 성북동 갈야산 43 지도보기
성격 왕족
성별
본관 삼척

[정의]

실직군왕으로 책봉된 뒤 삼척군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받은 신라대보공(大輔公)김알지(金閼智)[65~?]후예.

[개설]

실직군왕 김위옹의 위패는 보본단에 모셔져 있으며, 갈야산 중턱에 위치한 실직군왕묘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김위옹의 아버지 김추의 위패는 보본단 내 숭모사에 모셔져 있다. 김추의 외아들 김위옹실직군왕으로 책봉된 뒤 삼척군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가계]

삼척김씨는 신라대보공(大輔公)김알지(金閼智)[65~?]의 후예이다. 김위옹의 아버지 김추(金錘)는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978]의 여덟 번째 아들이며,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고려시대 최고 관직]을 지내고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다.

삼척김씨에서 분관된 씨족으로는 진주, 영월, 경산, 남원, 길안, 옹진, 진위, 춘양 등 8개 김씨 분파가 있다.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종인들의 현황은 남한에 약 8만 명, 북한에 약 2만 명이 각각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 사항]

김추의 외아들 김위옹(金渭翁)실직군(悉直君)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실직군왕(悉直郡王)으로 책봉되면서 실직군(悉直郡)[현재 삼척시(三陟市)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묘소]

실직군왕릉강원도 삼척시 성북동 갈야산 43에 있다. 면적은 임야 약 8000㎡[약 2441평]이다. 실직군왕비[밀양 박씨]의 능은 강원도 삼척시 사직동 산243에 있고, 면적은 임야 약 4700㎡[약 1422평]이다. 실직군왕릉과 실직군왕비릉은 1977년 11월 28일 강원도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능림(陵林) 또한 1977년 11월 28일 강원도 문화재보호구역 제192호로 지정되었다.

실직군왕 김위옹의 26세손 김흥일(金興一)은 1838년(헌종 4) 삼척부사 이규헌(李圭憲)의 협조로 여러 종친들과 더불어 실직군왕릉실직군왕의 부인 묘인 사직릉을 탐방하여 확인하였다. 그 후 1840년(헌종 6)에 망제단(望祭壇)과 비(碑)를 세워 매년 실직군왕릉에 제(祭)를 지내고 있다.

실직군왕 김위옹과 그의 아버지 김추를 봉사(奉祀)하는 재사(齋舍)인 보본단(報本壇) 안에 있는 ‘실직군왕망제단기(悉直郡王望祭壇記)’에는 실직군왕릉과 왕비릉, 재사인 보본단을 설치한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연혁을 잘 알리고 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자(夫子)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묘가 바라보이는 곳에 단(壇)을 만들고 제사를 지낸다는 문구가 있다. 지금 우리 실직씨(悉直氏)의 망제단도 역시 이 문구에 의거하여 설치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실직(悉直) 시조의 이름은 위옹(渭翁)으로, 신라경순왕의 여덟 번째 아들 일선군(一善君)의 원자(元子)이다. 실직을 봉토로 받아 그대로 계속 살았으니 마땅히 그의 묘도 이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대가 멀어져서 증거가 없어 오래 동안 제사 의식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후손들의 지극한 한(恨)이 되었다. 다만 저 갈야산(葛夜山)과 사직(史直)에 보통의 무덤과 다른 두 개의 묘가 있다. 노인들은 이를 두고 서로 전하며 이르기를 실직군왕 부부의 능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비갈(碑碣)이 없다. 이에 1838년 헌종 4년 가을에 내가 여러 종친들과 더불어 상의하고는 길일을 택하여 제사를 지내 알리고는 땅을 파서 지석(誌石)을 찾았다. 그러나 단지 흙을 구워 만든 술그릇 몇 점만 나왔을 뿐 증거로 삼을 만한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무덤 입구를 잘못 뚫었다는 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무덤을 자세히 살펴보니 돌을 포개고 흙을 쌓아 광(壙)을 만들었는데 매우 넓었고, 수도(隧途)를 별도로 두었다. 또 장대(壯大)한 해골이 있었다. 해골은 산세를 따라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손은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염습을 하지 않아 마치 평상시 모습 같았다. 아직도 옷과 이부자리 형상이 남아 있었으나 관(棺)과 곽(槨)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이는 지금의 풍습과 비교하여 장사 지내는 것과 크게 다르니 역시 평범한 사람의 무덤은 아니었다. 즉시 도로 흙을 덮어 쌓고는 위로하여 편안하게 하였다. 나중에 또 갈야산의 무덤에서 지석을 찾았으나 얻지는 못하였다. 그 무덤을 살펴보니 사직(史直)의 무덤과 같았다.

이에 다시 여러 종친들과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이 무덤들은 비슷하게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모두 지명(誌銘)이 없으니 어찌 함부로 믿겠는가. 대체로 노인들의 진술과 읍지(邑誌)의 기록으로 보면 갈야산 아래 월계(月溪)는 곧 우리 시조의 유지(遺址)이고, 그 위쪽 절벽에 있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것은 곧 우리 시조의 유정(遺井)이다. 이에 따라서 가만히 생각건대 영원히 어리석지 않는 혼령이 서로 어울려서 이 가운데를 오르내릴 것이니 지난번에 말한 단(壇)을 만들어서 망제(望祭)를 지내는 예(禮)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더니 모두가 적극 찬성하였다.

이에 따라서 다음 해 봄에 재물을 모아 일을 시작하였다. 월계(月溪) 동쪽 해방(亥方)을 등진 평평한 곳을 택해 땅을 손질하여 단을 만들고는 비를 세워서 명문(銘文)을 새겼다. 또 주위를 담으로 두르고 문을 달았으며, 수졸(守卒)을 두어 풀을 베고 목축(牧畜)하는 것을 금하였다. 또 그해에 제례 의식을 정하여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고, 제사를 마친 후에는 물러나와서 조상이 남긴 복을 받으며 종족(宗族) 간 정을 도모하고 차례를 정하였으니 이 해는 곧 1840년(헌종 6)으로 10월 보름이었다.

아! 우리 가문이 수백 년 동안 이루지 못한 정사(情事)를 이제야 이루었으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은가. 다만 원컨대 모든 종친은 이것을 이어서 더욱더 노력하여 제토(祭土)를 늘이고 재사를 설치함으로써 영원히 쇠퇴하지 않도록 한다면 또한 더욱더 큰 다행이겠다. 삼가 눈물을 흘리며 간략하게 서술하였으니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방도로 한다.

1841년(헌종 7) 2월에 25세 손흥일이 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현재 실직군왕릉은 주위에 담장을 두른 채 능 앞에 장명등 1개가 있으며, 좌우에는 망석과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능 주변에는 돌로 조각한 호랑이, 말, 양을 한 쌍씩 배치하여 능을 수호하게 하였다.

[상훈과 추모]

1840년(헌종 6)에 망제단과 비를 세워 매년 실직군왕릉에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실직군왕김위옹을 모시는 제의가 실직군왕대제로, 매년 음력 3월 15일 오전 11시에 봉행된다. 매월 삭(朔)[초하루]과 망(望)[15일]에 직원(直員)이 봉행하는 분향이 있다. 또 청명다례(淸明茶禮)라 하여 매년 청명일에 유림들이 군왕의 예우로 다례 행사를 봉행한다. 봉심례는 매년 음력 8월 삭일 오전 10시에 실직군왕릉과 실직군왕비릉 양릉에서 봉행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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