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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33
한자 朝鮮時代
영어공식명칭 The Period of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조선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3년(태조 2) - 삼척부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13년(태종 13) - 삼척도호부 설치

[정의]

조선시대의 강원도 삼척 지역의 역사.

[개설]

태조 이성계는 1393년(태조 2)에 삼척이 목조이안사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삼척군에서 삼척부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1413년(태종 13)에 삼척도호부로 읍격이 강등되었다. 삼척도호부 산하에는 당초 5개의 리가 있었지만 1630년(인조 8)경에 4개를 신설하여 9개의 리가 되었다. 그 후 숙종 연간에 리를 면으로 개칭하고 3개의 면을 신설하여 총 12개의 면이 되었다.

군사제도는 육수군의 경우 진관체제(鎭管體系)가 성립될 때 거진(巨鎭)이 설치되었지만 1467년(세조 13) 삼척진이 강릉진관에 소속됨으로써 도호부사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임하는 제진(諸鎭)으로 격하되었다. 수군의 경우 삼척포 진의 수군첨절제사는 삼척진관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4개 포진의 만호(萬戶)를 통솔하였다.

삼척 지역에는 또한 평릉도 소속의 4개 역(域)이 있었다. 한편 삼척 지역의 가구와 인구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 완만한 감소 추세를 나타내었다.

[행정 제도]

태조 이성계는 1393년에 삼척이 자신의 4대 조인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1274]의 외향이라 하여 삼척군에서 삼척부(三陟府)로 읍격을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하였다. 이와 함께 삼척을 강원도의 계수관(界首官)으로 지정하였다. 이로써 삼척은 명실 공히 강원도 지역에서 중심이 되는 대읍(大邑)이 되었다.

이처럼 삼척부로의 승격은 합리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왕실과의 특별한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태조는 체제 안정을 위한 지지 기반 확보 차원에서 합리 기준 없이 왕실과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삼척의 읍격을 승격시킨 것으로 보인다. 정확하게 말하면 삼척은 이안사의 외향이 아니라 목조비 효공왕후 이씨의 외외향(外外鄕), 즉 효공왕후 모친인 돌산군부인 정씨의 외향이다.

이에 따라 태종대에 들어와 그동안 무질서하게 승격되던 읍격을 인구의 다과(多寡)와 토지 면적의 광협(廣狹)을 기준으로 하여 개편될 때 삼척의 읍격도 재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삼척은 1413년 삼척부에서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로 읍격이 강등되었다. 이에 따라 도호부사는 종3품 관원이 임명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후 삼척도호부는 조선말까지 별다른 개편 없이 지속되다가 1895년(고종 32)에 삼척군(三陟郡)으로 개편되어 강릉부 소속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6년에 다시 강원도 소속으로 바뀌었다.

삼척도호부는 하부 행정 구획으로 리(里)와 면(面)을 두고 있었다. 당초 삼척도호부 산하에는 부내·노곡·장생·미로·북평 등 5개의 리가 있었지만 1630년경 당시 부사이던 이준(李埈)[1560~1635]이 매곡·덕번·소달·박곡 등 4개 리를 신설하여 총 9개 리가 되었다. 그 후 숙종 연간[1674~1720]에 리를 면으로 개칭하였다. 이와 함께 장생을 상장과 하장, 덕번을 근덕원덕, 북평을 도상과 도하로 각각 분리 및 신설하여 총 12개 면이 되었다.

[군사 제도]

육수군(陸守軍)의 경우 1397년(태조 6)에 진(鎭)을 설치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어 병마를 통솔하도록 하였다. 삼척진의 첨절제사는 도호부사가 겸임하였다. 그 후 1457년(세조 3)에 진관(鎭管) 체제가 성립될 때 삼척에는 거진(巨鎭)이 설치되어 제진(諸鎭)에 속한 울진·평해를 거느렸다. 그러나 1467년 삼척진이 강릉진관에 소속됨으로써 도호부사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임하는 제진으로 격하되었다.

수군의 경우 고려 말인 1384년(우왕 10) 삼척포진에 처음으로 만호(萬戶)를 둔 이후 그대로 조선 초기까지 존속하였다. 조선 초기 삼척포 진의 만호는 도호부사가 겸임하였다. 그 후 1419년(세종 원년) 8월에 강원 감사의 건의로 도호부사가 겸임하던 만호를 폐지하고 수군 전담 지휘관인 수군첨절제사를 두기로 하였다. 이에 바로 그 해에 김천서가 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전임 지휘관인 수군첨절제사의 파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되었다. 아마 1422년(세종 4)부터 다시 도호부사가 수군첨절제사를 겸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다가 1462년(세조 8) 9월에는 병조에서 삼척포는 요충지인 데다 부사가 수군과 육군을 겸해서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사변이 일어나면 대처하기 어렵다며 만호를 둘 것을 건의하였다. 여기에 세조도 동의하여 당시 폐지된 연곡포 만호 황기강이 삼척포 만호로 옮겨왔다. 이로써 삼척포진은 첨절제사 진영에서 다시 만호 진영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삼척포진은 진관체제가 완성된 후인 1468년(세조 14)에 다시 첨절제사 진영으로 승격되어 최한생이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진관체제 아래에서 삼척포진의 수군첨절제사는 삼척진관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안인, 고성, 울진, 월송 등 4개 포진(浦鎭)의 만호를 통솔하였다. 그 후 삼척포 첨절제사는 1672년(현종 13)에 영동 지역을 관장하는 영장(營將)을 겸임하고, 1673년(현종 14)에는 영동 지역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였다.

[역원 제도]

조선시대 삼척 지역에는 평릉, 신흥, 사직, 교가, 용화, 옥원 등 5개 역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평릉도(平陵道) 소속이었다. 그 가운데 평릉역은 평릉도 찰방(察訪)[역승(驛丞)]이 소재하는 중심 역이었다. 그러나 1475년(성종 6)부터는 교가역이 찰방역이 되었다. 이 밖에도 삼척 지역에는 만년, 제궁, 죽현 등 3개 원(院)이 있었다.

[가구와 인구]

15세기 전반에 삼척도호부의 가구는 581개였고, 인구는 2613명이었다. 그러나 1606년(선조 39) 호적 작성 당시는 1141가구였으며, 인구는 5482명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었음에도 170여 년 사이에 가구와 인구가 2배로 늘었다.

그 후 1751년(영조 27) 삼척도호부의 가구는 4017개였고, 인구는 1만 8137명이었다. 또 1759년(영조 35)에는 3985가구에 인구 1만 8069명이었고, 1789년(정조 13)에는 3808가구에 인구 1만 4966명이었다. 그 후 1816년(순조 16)에는 4089가구에 인구 1만 7795명이었고, 1826년(순조 26)경에는 3857호에 1만 4777명이었다. 대체로 보아 조선 후기 삼척도호부의 가구와 인구는 완만하지만 감소 추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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