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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022
한자 三陟-海女
영어공식명칭 Haenyeo, Female Diver of Samcheok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동환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 앞바다에서 자맥질을 하며 해조류를 채취하는 여성 잠수부.

[개설]

조선시대에는 지역 특산물 진상을 위하여 전복, 해삼 등을 채취하였다. 조선시대 제주 해녀의 출가는 과도한 공납을 피해서 육지로 도주한 경우가 많았다. 제주 해녀가 육지로 이주한 기록은 『성종실록』[1447], 『학성지』[1749], 『규합총서』[1809], 『경상도 울산부호족대장』 등에 수록되어 있다. 『성종실록』 262권 1462년(성종 23) 2월 8일조에는 “근년에 제주 세 고을의 인민이 자칭 두독야지[한라산의 별칭]라 하면서 처자들을 거느리고 배 편으로 경상도·전라도의 바닷가 근처로 옮겨가 정박하는 자가 수천여 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앙관리와 지방토호의 과도한 수탈, 왜구의 빈번한 침입, 과도한 진상, 부역 증대 등으로 제주도를 이탈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제주 인구는 차츰 감소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1629년(인조 7) 출륙금지령이 내려지게 되지만 제주 유민은 줄지 않는다. 제주도 유민들은 해산물이 풍부하면서 거리로도 가까운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 집중 거주하여 갔다.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된 이후 일본의 잠수기 어민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전복 등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제주 해녀들은 생계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제주 바다에서 수확하는 해산물의 양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초기에는 1기에 불과하던 잠수기가 1906년에는 300~400기로 증가하였다. 잠수기라는 고효율의 어업 기계는 자원 고갈은 물론 유휴 잠재 노동력인 제주 해녀들의 출향을 가속시켰다. 개항기·일제강점기에는 잠수기 어업 등장으로 제주 어장이 황폐해지자 제주 해녀들은 1895년부터 경상남도로 출가 물질을 떠났다. 이후 해녀들의 출가 물질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출가 범위도 상당히 넓어져 갔다. 경상도·강원도·다도해·함경도뿐만 아니라 일본도쿄와 오사카, 중국칭다오와 다롄,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출가 물질을 나갔다.

[삼척의 해녀]

삼척에서는 1960~1980년대 초까지 제주도 해녀들을 모집해서 미역을 채취하였다. 삼척 해안마을 주민 2~4명이 제주도로 내려가서 각각 10~12명을 모집해 왔다. 이렇게 해녀를 모집해서 데려오는 사람을 이른바 ‘해녀사공’이라 하였다. 해녀사공은 자신이 모집해 온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의 일정 부분을 수수료로 챙겼다. 많을 때는 제주도 해녀 50~60명이 육지로 올라와 동해안 마을에서 출가 물질을 하며 미역, 전복, 문어, 해삼, 성게, 멍게, 우뭇가사리, 다시마 등을 채취하였다. 이때 삼척 해안마을에 들어온 해녀 가운데에는 마을 총각과 결혼하여 정착한 해녀들도 있었다. 이들은 ‘출가해녀’라고 불리었다. 현재는 해산물이 고갈되어 제주도 해녀를 모집해서 데려오지는 않고 마을에 거주하는 해녀 중심으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다.

미역이 많이 채취되던 1960~1980년대에는 제주도 해녀뿐만 아니라 머구리 잠수부도 많이 활동하였다. 많을 때는 10명 이상의 잠수부가 거주하며 미역 등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머구리 잠수부는 거의 사라지고 과거에 잠수부를 하던 사람들만 있다.

특히 삼척 갈남마을에 해녀와 머구리 잠수부가 많은 것은 갈남 해안에서 해산물이 풍부하게 채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남마을 주민들은 4~6월 3개월 동안 미역을 채취한 수익으로 1년을 풍족하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와 양식 미역이 유통되면서 자연산 미역 수요는 줄어들었다. 자연산 미역은 제품의 질이 고르지 않고 햇빛에 의한 변색이 많아서 점차 인기가 시들어져 갔다. 이뿐만 아니라 백화현상 등으로 미역 생산량이 격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역 채취는 갈남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생업 활동으로 여겨지고 있고, 4~6월에는 마을의 핵심 일정을 미역 채취에 맞춰서 움직인다.

1960~1970년에는 삼척 해안마을 사람들이 제주도까지 내려가서 해녀를 데리고 왔다. 이들이 출가 물질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인 역할은 조선시대에는 해녀의 남편, 개항기·일제강점기에는 객주, 1950~1970년대에는 해녀사공이 하였다. 해녀사공 3~4명이 내려가서 10~12명의 해녀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40명 안팎의 해녀가 갈남마을에서 물질을 했고, 많은 해에는 60여 명의 해녀들이 물질을 했다고 한다. 작은 어촌마을에 갑자기 40~50여 명의 해녀가 몰려오면 방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을에 있는 빈방에서 2~3명이 함께 지냈다. 그렇게 한번 모집해서 갈남마을에 데리고 오면 2월 말~8월에는 갈남마을에 머물면서 물질을 했다. 해녀사공은 1년 물질이 끝나는 8월이 되면 데려고 온 해녀들을 제주도로 데려다 주었다.

이렇게 데리고 온 해녀가 물질해서 채취한 해산물은 해녀사공이 10%, 해녀가 90%를 가졌다. 해녀사공은 특별한 자격 조건은 없었다. 갈남마을 주민 가운데 의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제주도로 내려가서 해녀를 모집해 올 수 있었다. 당시에는 미역 외 전복, 성게, 해삼 등은 어디서나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고 노를 저어 임원(臨院) 앞바다까지 가서 물질을 하곤 했다.

결혼한 해녀의 경우 가족과 장기간 떨어져서 지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갈남마을까지 온 해녀 대부분은 처녀였다. 그래서 물질이 끝나면 동네 총각들하고 밤에 어울려 함께 놀기도 하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부문 금메달을 딴 황영조 선수의 어머니 이만자 씨는 제주 협재리 출신으로, 출향 물질을 나왔다가 삼척시 근덕면 초곡리에 정착한 출가해녀 출신이다. 제주 해녀 가운데 혼인해서 출가물질을 하던 마을에 정착해서 사는 해녀가 늘면서 동해안 어촌들은 사시사철 해산물 채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삼척에서 해녀가 가장 바쁜 시기는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이다. 이때는 미역 채취, 성게 잡이로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가장 한가한 시기는 8~11월 4개월이다. 이때는 성게알도 없는 데다 해삼도 알을 낳기 위해 바위 밑으로 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물질을 거의 하지 않고 밭일을 하며 지낸다.

[해녀 작업복 및 물질 도구]

제주도 해녀는 전통 작업복을 ‘물옷’이라고 하였다. 고무 잠수복이 들어오기 전인 1970년대 초반까지 해녀들은 광목으로 만든 잠수복인 물옷을 입었다. 물옷은 크게 물적삼[상의], 물소중이[하의], 물수건으로 이루어졌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1702]에 그려진 물소중이를 입고 물질하는 모습에서 안 돼도 17세기 때부터는 물옷을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광목으로 만든 기존의 잠수복은 방한이 되지 않아 물속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1970년 초에 고무로 된 해녀복이 보급되면서 고무 잠수복 착용이 보편화되었다. 고무 잠수복은 전통 해녀복에 비하여 방한 기능이 탁월하고, 부력이 있어서 물질하기가 수월하였다. 또 바위에 부딪쳐서 생기는 타박상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준다. 해녀들은 보통 2년에 한 번 해녀복을 새롭게 맞춘다. 2년 입게 되면 해녀복이 해어지지는 않지만 보온이 잘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여름에는 오래된 잠수복을 입고, 겨울에는 새로 맞춘 해녀복을 입는다. 갈남마을 해녀들은 잠수복을 속초에 있는 제작자에게 주문해서 만들었다.

당시 해녀 치수를 해녀복 제작자가 모두 알고 있어서 이름만 말하면 제작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2015년부터는 울산에 있는 제작자에게 맡긴다. 속초 제작자에게 주문한 해녀복은 몇 번 입으면 해녀복이 갈라져 피부에 여러 번 닿으면서 생채기를 줬기 때문에 반복해서 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더욱 아팠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해녀를 할 때 테왁을 박으로 직접 만들었다. 제주도에서는 테왁을 만들기 위하여 집집마다 박을 심기 때문에 초가집 지붕 위에 박이 줄줄이 열려 있었다고 한다. 박은 잘 익은 걸로 만들어야 하였다. 잘 익은 박에다 구멍을 내서 씨를 빼낸 후 다시 구멍을 막아 사용하였다. 현재는 편의상 스티로폼으로 만든다. 테왁은 해녀가 물질을 하다가 잠시 물 밖으로 나와 쉴 수 있는 역할과 망사리를 띄우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테왁과 망사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망사리는 채취한 해산물을 담는 도구이다. 테왁과 망사리는 해녀나 해녀의 남편이 직접 제작한다. 갈남마을 해녀들은 미역을 채취할 때 테왁과 망사리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해녀 한 명 당 10개 이상의 테왁과 망사리를 가지고 있다. 연철[납]은 해녀가 물속으로 쉽게 잠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도구이다. 고무로 된 줄에 납덩이를 달아서 허리에 감는다. 까꾸리[갈퀴]는 나무자루에 ㄱ자로 구부린 쇠꼬챙이를 말한다. 바위틈에 숨은 문어 등을 잡거나 물속의 돌멩이를 뒤집거나 바위에 부착해서 살아가는 해산물을 뒤집을 때, 바위에다 걸어서 몸을 앞으로 당기는 용도 등으로 사용된다. 미역낫은 미역 채취 비중이 높은 갈남마을 해녀들에게 중요한 도구이다. 일반 낫처럼 생겼지만 조금 작다. 수경은 족쇄눈이라고도 한다. 수경은 1년 정도 사용하면 피부와 접촉하는 고무 부분이 낡아서 교체해야 한다.

이 밖에도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불턱이 있다. 제주도에서의 불턱은 돌을 둥글게 쌓아 만든 형태로, 이곳에서 불을 피워 언 몸을 녹였다. 갈남마을 항구 안쪽에 해녀들이 불을 피워서 몸을 녹이고 간식을 먹는 장소가 있다. 별도의 시설은 하지 않았지만 늘 동일한 장소에서 불을 피우기 때문에 타다 남은 잿더미와 간단한 땔감 정도가 주변에 쌓여 있다.

[해녀 작업]

미역, 성게, 해삼, 문어, 홍합, 멍게, 전복 등 해녀가 채취하는 다양한 해산물 가운데 미역과 성게 수익이 가장 높다. 성게는 5~6월에 알이 찬다. 이때 잡은 성게 수익성이 가장 높다. 성게는 미역 채취 작업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시작한다. 성게를 잡을 때는 주로 오전 8시에 들어가서 낮 1시까지 물질을 한다. 성게 작업 철에는 해녀들이 잡은 성게를 항까지 운송하는 작업선을 별도로 대여하였다. 이때 해녀들은 일정한 돈을 거두어서 작업하는 날에만 배를 빌린다. 운송선은 해녀들을 각자 원하는 바다에 내려주고 육지로 돌아와 있다가 시간이 되면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로 나가서 성게를 운반해 온다.

성게 잡이는 힘과 숙련도 등이 중요하다. 특히 성게잡이는 미역보다 깊은 수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노동 강도가 크다. 이와 함께 그날 어느 위치에서 작업을 했느냐가 그날 채취량과 직결된다. 해녀들은 각자가 작업할 위치를 택해서 물질을 한다.

성게는 해녀의 주 수익원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해녀가 하루 4~5시간 물질을 하면 50만~60만 원을 벌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게를 잡아서 곧바로 중개상인에게 판매하지만 과거에는 성게알을 분리해서 팔았다. 성게 채취가 마무리되는 7월 중순에는 홍합을 채취한다.

삼척 해안 일대에 방파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문어, 전복, 해삼 등이 해안가에서 많이 잡혔다. 4월 중순이면 큰 문어가 해안가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방파제가 생긴 뒤부터 해수 순환이 잘 되지 않다 보니 해안가에서는 문어가 잘 잡히지 않는다. 더욱이 요즘은 문어통발이 육지에 인접한 바다를 에워싸고 있어서 해안가까지 들어오는 문어가 거의 없어서 해녀에게 잡히는 문어 수는 급격히 줄었다.

암반이 많은 지역에는 미역, 다시마 등 해초가 많이 나기 때문에 이 해초를 먹이로 삼는 전복이 많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복 가공공장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는 채취량이 감소해서 해녀 수입에 차지하는 비중도 극히 적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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