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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007
한자 東海岸最高-城邑國家, 悉直國
이칭/별칭 실직곡국,실직씨지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2년(파사이사금 23) - 실직국과 음즙벌국 간의 영토 분쟁 및 실직국의 사로국 항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4년(파사이사금 25) - 실직국 지역 반란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존재한 초기 형태의 국가.

[개설]

실직국은 삼척 지역에 존재한 초기 형태의 국가로, 중심지는 지금의 삼척시 사직동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직국은 삼척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북도 청하와 흥해에서 강원도 강릉시 옥계에 이르는 동해안의 띠 형태 공간을 활동 무대로 삼으면서 강원도 및 경상북도동해안 일대의 해상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실직국은 중국의 군·현뿐만 아니라 진한, 변한과도 적극 교역하였다. 그러나 실직국은 경상북도 안강 지역에 있던 음즙벌국이 종주국인 사로국과 대립하다가 멸망하자 102년(파사이사금 23) 자진해서 사로국에 항복하였다.

[실직국이란]

신석기시대에 평등하던 부족사회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빈부의 차가 나타나고 지배·피지배 관계가 생겨나 각처에 정치체(政治體)가 출현하였다. 이 시기에 삼척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정치체가 실직국(悉直國)이다. 실직국실직곡국(悉直谷國) 또는 실직씨지국(悉直氏之國)으로도 불렸다. 당시 실직국은 몇 개의 읍락(邑落)으로 구성되고, 이들 읍락 가운데 실직국의 정치와 경제 중심이 되는 국읍(國邑)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직국의 위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삼척군(三陟郡)은 본래 실직국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를 볼 때 실직국이 오늘날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505년(지증왕 6)의 실직주(悉直州) 설치,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에 나오는 ‘우추실지하서아군사대등(于抽悉支河西阿郡使大等)’이란 군명(郡名)과 관직명, 울진봉평신라비에 나오는 ‘실지군주(悉支軍主)’, ‘실지도사(悉支道使)’ 등의 직명 등을 통해서도 실직국이 오늘날의 삼척에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실직국을 구성한 읍락이 지금 삼척 지역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지석묘를 비롯한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을 활용해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 삼척시와 동해시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 및 유물 분포지를 권역별로 나누면 삼척시 사직동을 중심으로 한 오십천 주변, 동해시 북평동 일대, 동해시 송정동·이로동·쇄운동 일대, 동해시 망상동 일대,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 일대, 삼척시 원덕읍 일부 지역 등이 된다. 실직국을 구성한 읍락들은 이들 청동기시대 유적 및 유물 분포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읍락 가운데 실직국의 중심 읍락은 어디에 있었는지가 관건이다. 중심 읍락인 국읍은 오늘날의 삼척시오십천 주변에 있는 사직동(史直洞)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비정(比定)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실직(悉直)은 사직(史直)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 후기 문신 허목(許穆) [1595~1682]은 1662년(현종 3)에 편찬한 『척주지(陟州誌)』에서 사직은 옛 실직씨지국이라 하였고, 삼척군수 심의승(沈宜昇)은 1916년에 편찬한 『삼척군지(三陟郡誌)』에서 사직은 실직의 또 다른 표기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심의승은 1916년 당시 사직리(史直里)에는 실직곡(悉直谷)을 가리키는 ‘실즉골’, ‘실젹골’, ‘시젹골’, ‘시덕골’ 등의 말이 사용되고 있다고 적어 놓았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실직국의 중심지 국읍은 현재의 삼척시 사직동 일대에 위치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직국의 활동 영역]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 조에는 실직국과 경상북도 안강(安康) 부근에 있던 음즙벌국(音汁伐國) 간에 벌어진 영토 분쟁 및 그 해결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사이사금 23년 가을 8월에 음즙벌국실직곡국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파사이사금]에게 나아가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은 이를 난처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수로왕(首露王)은 연로(年老)하고 지식도 많다’고 하면서 그를 불러 물었는데 수로왕이 의견을 제시하여 분쟁 대상이 된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도록 하였다.”

이 인용문의 내용은 비록 설화 요소가 강하지만 여기서 102년(파사이사금 23) 8월에 실직국음즙벌국 간 영토 분쟁이 벌어졌고, 결국 두 나라가 스스로 이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여 사로국(斯盧國)의 왕 파사이사금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파사이사금은 자신이 이 두 나라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난처하게 여기고 금관국수로왕에게 자문하여 해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실직국음즙벌국 간 영토 분쟁 기사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은 실직국음즙벌국 간 영토 분쟁 사실 여부에서 시작하여 실직국의 위치 및 범위 문제 등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실직국음즙벌국 간 영토 분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 일찌감치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실직국의 위치를 삼척으로 보고 음즙벌국의 위치를 경북 안강 부근으로 비정할 경우 두 나라 간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영토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영토 분쟁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실직국의 위치를 삼척으로 보고 그 영토 범위를 경주 부근까지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실직국의 범위를 영덕 남쪽 청하(淸河)까지라고 적시한 경우도 있다. 또 역시 영토 분쟁을 사실로 인정하는 입장에서 실직국의 위치를 삼척이 아닌 경주 부근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지금까지 경주시 천북면 위치설과 흥해(興海) 위치설도 제기되어 있다.

이 밖에도 실직국음즙벌국 간 영토 분쟁의 대상이 된 곳이 어느 지역이냐에 대해서는 경주 부근설과 울진·영덕 지역설이 제기되었다. 또 실직국음즙벌국 간 영토 분쟁을 역사에 반영된 것으로 보면서도 그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102년이 아닌 3세기 중반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삼국사기』의 실직국음즙벌국 간 영토 분쟁 기록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실직국의 위치가 삼척 지역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실직국음즙벌국 간 영토 분쟁은 두 나라 간 경계에서 일어난 직접 충돌로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경북동해안 일대의 해상교역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으로 추측된다. 즉 두 나라가 각각 경상북도동해안 지역의 소규모 항구를 자국의 세력권에 포함시켜 해상 교역 체계를 구축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분쟁으로 보인다.

어쩌면 실직국이 일정한 정치 교섭 관계를 맺고 있던 경주의 사로국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음즙벌국 영토 통과 문제를 두고 분쟁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시 실직국이 정치 교섭이나 경제 교역을 위하여 사로국을 왕래하려면 해로나 육로로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 지금의 경상북도 청하·흥해 부근 지역에서 안강을 거쳐 경주로 들어갔을 것이다. 아무튼 음즙벌국과의 영토 분쟁을 통하여 당시 실직국의 세력이 남쪽으로는 음즙벌국의 북쪽 강역인 청하·흥해 일대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포항 및 흥해 지역과 그 북쪽의 경상북도·강원도동해안 지역은 무덤 양식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예국(濊國)의 남쪽 경계로 추정되는 지금의 강릉시 옥계 지역까지가 실직국의 활동 무대였을 것으로도 보인다. 이는 옥계 지역에 있던 우계현(羽谿縣)이 1020년(고려 현종 11)까지 삼척군의 영현(領縣)이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실직국의 활동 영역은 삼척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북도 청하·흥해에서 강원도 강릉 옥계에 이르는 동해안의 대상(帶狀)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직국과 주변국 관계]

실직국의 세력은 경상북도동해안 지역 일대까지 미쳤다. 이는 실직국이 강원도 및 경상북도동해안 일대를 해상 활동 무대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주변에 강력한 경쟁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실직국은 한반도 중부 동해안 일대에서 해상권을 장악하고 교역을 독점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후 1세기 전후의 동해안은 중국의 군·현이나 북쪽 옥저(沃沮)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였으며, 남쪽의 사로국도 아직 경주에 머물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서 동해안은 실직국의 해상 활동 독무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직국은 해상 활동에서 삼척오십천 하구에 있는 항구를 중심으로 삼고 울진·영덕·청하 지역 해안의 작은 항구들을 중간 기항으로 삼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실직국은 당시 진한(辰韓)연맹체의 맹주격인 사로국과 일정한 정치 및 경제 교섭 관계를 맺고 그 영향력 아래 있은 것으로 보인다. 또 실직국은 남쪽의 진한·변한(弁韓)의 여러 소국(小國)들과도 해상을 통한 교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실직국음즙벌국이 자신들의 영토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사로국 왕 파사이사금에게 요청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고고학 자료에서 엿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실직국은 활발한 해상 활동을 통하여 중국의 군·현들을 비롯한 북쪽의 옥저·동예(東濊)와도 교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실직국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동해시 송정동 주거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여기서는 2, 3세기 때에 해당하는 낙랑계 한식(漢式) 토기를 비롯하여 마노·유리·수정·천하석·경옥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든 다량의 옥구슬류[곡옥(崑玉)·환옥(丸玉)·관옥(冠玉)]와 구리거울[동경(銅鏡)]의 재가공품인 파경(破鏡)이 출토되었다. 또 제련(製鍊)과 관련된 철 찌끼, 송풍관, 화로벽체 등이 다수 확인되었다.

비록 단편에 그친 고고 자료이지만 중국의 한식 토기와 진한 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각종 옥제품의 출토는 실직국이 중국의 군·현뿐만 아니라 진한·변한과도 적극 교섭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실직국은 당시 동해 먼 바다에 떠 있는 우산국(于山國)과도 해상 교류를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로국의 실직국 병합]

강원도와 경상북도동해안 일대에서 해상권을 장악하고 교역을 독점하던 실직국음즙벌국과 영토 분쟁이 있던 해인 102년에 압독국(押督國)과 함께 사로국에 항복하였다. 실직국이 어떤 연유에서 사로국에 항복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로국이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정치 교섭 관계를 맺고 있던 실직국에 좀 더 진전된 신속(臣屬)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였고, 이 요구를 실직국이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실직국의 항복이 사로국의 음즙벌국에 대한 무력 정벌 이후에 있은 것을 보면 실직국은 사로국의 무력 정벌이라는 위협 아래에서 자진 항복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실직국이 자진 항복한 만큼 사로국은 복속된 실직국 지역을 지방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켜서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의례의 공납(貢納)을 매개로 하여 지배·피지배의 신속 관계만 맺고는 기존의 실직국 토착 지배 세력의 자치를 허용하는 간접 지배를 하였을 것로 짐작된다.

그런데 실직국이 사로국에 항복하고 2년이 지난 후인 104년(파사이사금 25) 7월에 실직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사로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사로국의 강제 통합에 대한 실직국 지배 세력의 저항인지 실직국 지배층의 사로국 항복에 반대하는 세력의 반발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사로국의 독주에 대한 실직국 지배층의 불만 표출일 수도 있다. 즉 사로국이 실직국 병합 후 토착 지배 세력의 기득권을 급속히 잠식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반란을 일으킨 무리는 사로국의 남쪽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반란이 진압된 후 실직국 지역에는 기존의 실직국 토착 지배 세력의 독자성은 약화되고 반면에 친사로국 세력이 점차 부식(富殖)[재산을 불려 넉넉하게 함]·강화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실직국의 주도 세력은 모두 해체되거나 몰락하였을 것이고, 이에 따라서 삼척 지역도 이른 시기에 사로국의 세력권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로국은 실직국을 병합함으로써 실직국의 영토뿐만 아니라 해상교역권까지 차지하는 등 동해안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사로국은 결국 영흥만에서 울산만에 이르는 동해안 전역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하고 비약 발전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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