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003
한자 宮闕-,黃腸木-禁標
영어공식명칭 Palace Hwang Jang Mok Geum Pyo
분야 지리/동식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조선
집필자 임호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황장봉산 -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흥전리|구사리|원덕읍 풍곡리(豊谷里)삼방산(三芳山)|이천리(理川里)마천산(麻川山)|우액산(牛額山)노곡리(魯谷里) 본동 등지도보기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조선시대 궁궐을 짓기 위해 보호하고 관리했던 황장목과 황장목을 보호, 관리하기 위해 세운 비석.

[삼척과 황장목]

19세기 후반에 지은 김종산(金宗山)의 『척주지(陟州誌)』 권 2, 산천조(山川條)에는 삼척 지방의 황장봉산을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강원도지(江原道誌)』[1940년] 권 3, 토산(土産), 삼척조(三陟條)에는 ‘교곡산에서 신라시대 황장목을 벌채하여 경주까지 운반했다는 전설’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도계읍 심포리, 흥전리, 구사리, 원덕읍 풍곡리(豊谷里)삼방산(三芳山), 이천리(理川里)마천산(麻川山), 우액산(牛額山)노곡리(魯谷里) 본동 등이 주요 산지이다. 특히 도계읍 노곡리 해변에는 아주 잘 자란 황장목이 있었는데, 높이가 15.6m, 둘레 5m로 1804년(순조 4) 인정전 재건을 위해 벌채하려 했으나 척수가 모자라 표찰만 붙여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풍곡리삼방산 황장목은 1803년(순종 3) 인정전 재건 당시 재목으로 반출되었다. 원덕읍 오목리(梧木里), 풍곡리(豊谷里), 근덕면(近德面)궁방산(宮房山) 등지에도 적송(赤松)과 흑송(黑松)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 봉산(封山)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노곡면(蘆谷面) 상마읍리, 중마읍리, 하마읍리 일대는 황장목이 많이 자생하였던 곳이다. 미로면(未老面)두타산 동남쪽 활기리(活耆里)와 동산양리목조고비릉(穆祖考妣陵)이 있는 지역은 봉산지역으로 지금까지도 철저히 관리되고 있어 우수한 황장목이 자생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삼척군 마평리(馬坪里)는 오십천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관에서 수목 벌채를 금지시킨 마을이라 하여 말인 들[禁山坪]이라 하였다고 한다.

[봉산과 금산]

금산(禁山)은 국가적 필요에 의하여 목재자원 특히 소나무를 배양하기 위하여 가꾸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국가적 필요란, 한성부에서 경관유지와 풍수적 필요에 의해서 서산을 중심으로 금산을 경영하였으며, 각 도에서는 주로 병선(兵船)의 제조와 수리에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기 위한 일이었다. 소나무를 양성하고 벌금(伐禁)하는 이유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비로소 필요한 재목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금산은 1699년(숙종 25) 이후 봉산으로 개칭되어 소나무의 배양 육성을 계속 담당하게 되는데, 이 때 주로 외방금산이었던 지역을 봉산으로 하였다. 금산이나 봉산은 모두 나라에서 필요로 되는 목재 자원의 확보와 배양을 위하여 사사로운 벌목을 금하고 있는 산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원칙적인 의미상 두 산에 차이는 없다.

[금표]

금표(禁標)란 금지나 경고 등을 나타낸 표지(標識)로써 왕이나 왕족이 사냥, 군사훈련, 산림보호 등의 목적으로 금지 구역을 설정하고 이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웠다. 금표는 금지구역의 입구나 산비탈, 하천 등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세워졌다. 넓은 뜻으로는 금송(禁松)·금줄 등도 이에 포함된다. 금표의 유형에는 사찰구역을 나타내는 금표[강원도 홍천군수타사 금표], 사냥구역을 나타내는 금표[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금표], 왕의 태실이 있는 곳에 출입을 금하는 금표[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신일1리 금표], 산림보호의 목적으로 세운 황장금표[강원도 원주시치악산 금표], 공물 확보를 위한 경계 금표[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회동리강릉부삼산봉표], 유배지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청령포 금표비] 등이 있다. 현존하는 강원도 내의 금표는 대체로 유배지 출입 제한을 위한 금표, 태실의 보호를 위한 금표, 공물의 무단채취를 금하는 금표, 금송금표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금송과 관련된 금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이천3리에 금표는 금송을 위한 표지인데, 이천폭포 상류에 있는 느티나무 서낭당 옆에 ‘금표(禁標)’라고만 새겨진 비석이 있으며, 비석의 크기는 높이 50㎝, 너비 30㎝ 이다.

[황장목 반출 사례]

황장목은 100m 거리에서 담뱃대를 30~40㎝ 정도의 눈앞에 대고 보았을 때 소나무가 가려지지 않는 크기의 나무를 뜻한다. 황장목은 나무질 부분이 누런색을 띨 정도로 송진이 응고되어 관솔처럼 보이는 소나무이며 좀처럼 갈라지거나 썩지 않는다고 한다.

대원군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하장면청옥산(靑玉山) 주봉에 산재해 있던 소나무가 동량재(棟梁材)로 활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소나무들은 남한강 상류인 하장천(下長川)을 이용 뗏목으로 한양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또 1553년(명종 8) 9월 경북궁이 화재로 소실되자 그해 10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영동 각 고을 백성들을 동원하여 하장면 중봉리에 있던 소나무 300주를 벌채하여 서울마포 나루터까지 뗏목으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 때 도끼 대목으로 벼슬을 받은 사람도 있는데,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 양리마을에 사는 박양헌, 경기도 가평에 사는 윤선도 등은 참봉노직(參奉老職)을 받았다.

1614년(광해군 6) 장생의 한 노인이 전하기를 “장생은 한강에서 가장 먼 상류에 있어 국가에서 군영을 짓기 위하여 이곳에서 목재를 베어가는데 그 부역을 감당하기가 어려울뿐만 아니라 군포를 내기가 힘들어 많은 유민(流民)이 생기고 특히 울탄(鬱呑)[지금의 어리(於里)] 내외촌에는 마을이 텅텅 비었고, 이곳 장생은 40여년 동안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다”고 한다. 노곡면 상마읍리(上麻邑里)에서는 1865년(고종 2) 경복궁을 중건할 때 도곡면 마을 불경곡에서 큰대들보 한 주를 벌채하여 근덕면덕산항까지 운반하여 배에 싣고 남해를 거쳐 서해를 돌아 서울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사금산불경곡에서 베어 낸 황장목은 직경이 6자[약 2m], 길이가 60여 자[약 20m]나 되었다고 하며, 각 면에서 할당되어 소집된 300여 명의 장정이 70리[약 27㎞] 길을 보름 이상 걸려 해안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마읍리 황장목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부터 이후 10년 동안 강원도강릉시 영림서 주관으로 대대적인 벌채가 벌어져 산림이 벌거숭이가 되었다.

[황장목의 관리]

1753년(영조 29) 조정에서는 황장(黃膓)을 영동과 영남 양도에 봉(封)해 엄중히 관리함에도 불구하고 법 질서가 해이해져 간악한 폐단이 증가하고 금표 밖이라고 하거나 혹은 사양산(私養山)이라 빙자하여 1장의 공문(公文)을 목민관으로 부터 받아내어 도끼와 자귀가 봉산(封山)에 함부러 난입하여 봉산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이러한 폐단이 삼척시를 비롯한 관동지방에 심하게 발생하자 심리사(審理使) 구택규(具宅奎)로 하여금 폐단의 근원을 깊이 파악하게 하였다. 구택규가 올린 서계(書啓)에서는 삼척(三陟)·강릉(江陵)·양양(襄陽)·고성(高城)·인제(麟齊) 5읍에 엄중히 금법을 수립하여 작벌(斫伐)을 할 수 없도록 요청하였다. 특히 사양산(私養山)에 있어서는 본래 봉산(封山)이 아니므로 국가와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 이 또한 사산(私山)에서 금양(禁養)하여 재목을 얻는다면 역시 봉산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표외(標外)라는 공문 1장으로 채벌하는 하는 것을 금지하게 하였다. 이에 삼척(三陟)·강릉(江陵)·양양(襄陽)·고성(高城)·인제(麟齊) 5읍은 표내거나 사양산이거나를 물론하고 서울 각사(各司)에서 비록 청해도 일체를 허락하지 않아 도끼와 자귀가 처음부터 경내(境內)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철저히 지킬 것을 명하였다.

무단으로 봉산 내에서 벌목할 경우 엄중한 처벌을 받았는데, 1461년(세조 7) 금송에 관한 상벌 규정이 상세하게 제정되었다. 상벌의 내용을 보면, 1, 2그루를 벤 자는 곤장 100대, 산지기는 곤장 80대, 해당 관리는 매〔笞〕40대, 3, 4그루를 벤 자는 곤장 100대에 군인으로 보내고, 산지기는 곤장 100대, 관리는 곤장 80대, 10그루 이상 벤 자는 곤장 100대에 전 가족을 변방으로 쫓아보냈다. 그리고 산지기는 곤장 100대에 군인으로 보내고 관리는 곤장 100대에 파면시켰다. 10년 동안 나무 한 그루 벤 사실이 없을 때에는 그 산지기는 상을 주어 산관직(散官職)으로 승진시켜주기도 하였다.

[황장목 목도꾼 소리]

흥선대원군이 경북궁을 중건할 때인 1864년 강원영동 지역 특히 삼척 지역에는 전국에서 많은 목도꾼들이 몰려 왔다. 목도꾼들은 고된 벌목과 운반 과정에서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 산천이 밝아 온다. 에헤 에헤야 얼러러 거리고 방아로다 을축 사월 갑자일레 경복궁을 이룩일세”라는 노동요를 지어 불렀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경북궁에 쓸 대들보를 구했는데, 결국은 삼척사금산(四金山)과 삼방산(三芳山)에서 찾아 내었다고 한다. 삼척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서 배에 싣고 동해를 돌아 남해와 서해를 거쳐 서울한강 물길을 따라 마포 나루터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경복궁 중건 때 대들보로 사용한 삼척의 황장목을 일컬어 삼척목(三陟木)이라 불렀다. 삼척지방에는 옛날부터 소나무를 베어 도끼로 다듬고 이를 운반할 때 여러 사람들이 모여 부른 목도꾼 소리라는 노동요가 전한다. 삼척시는 고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유봉산(國有封山)으로 지정된 산이 많았다. 그래서 경복궁 중건 때 대들보는 물론이거니와 동량목까지 삼척에서 벌목하여 바닷길 또는 뗏목을 이용해 서울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때 도끼질을 하고 나무를 운반하면서 부르던 목도꾼 소리는 서서 노래하는 선소리꾼의 선창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이 후창을 하면서 옆에서는 나무를 굴리고 앞에서는 굵은 새끼줄로 매어 당겼다고 한다.

「도끼질소리」

땡땡 소리가 왠소리/경복궁 짓느라고 땡땡 소리가 나온다/아 흥흥 어기야/척 늘어졌다 떡갈잎 척 늘어졌다 떡갈잎/제가 뭘 멋이 든 것처럼 우들우들 춤을 춰/아 흥흥 어기요 아 흥흥 어기야/외호리적 떡장사 외호리적 떡장사/경복궁 세대 궐 안에 인절 미장사 왜 왔소/아 흥흥 어기요 아 흥흥 어기야/개구리 청개구리 두 눈이 붉어지고/내발가진 개구리 수통처자를 보아도/개구리만 보인다 청개구만 보인다.

「목도꾼소리」

여러분네 일심 동력[후렴:웃야호호]/앉았다가 일어서며/고부량곱신 당겨주오/낭그는 크고 사람은 적다/엿차소리 낭기간다/마읍골에 낭기간다/한치두치 지나가도/태산 준령 넘어간다/앞줄에는 김장군이/뒷줄에는 이장군이/여기 모인 두메 장사/심을 네어 당겨주오/왈칵 덜컥 돌고개냐/타박타박 재고개냐/굼실굼실 잘도 간다/마읍골의 사금산에/불갱골에 오백여년/한해 두해 자란 솔이/황장목이 되었구나/아방궁의 상량목이/이 낭기가 될라는가/백양대의 도리 기둥이/이 낭기가 될랴는가/이 낭기가 경복궁의/상량목이 되었구나/한양 천리 먼길에/태산 준령 고개마다/녹수청강 구비마다/덩실덩실 잘도 간다/태고적 시절인가/청탁을 가리던가/요순적 시절인가/인심도 인후하고/초한적 시절인가/인심도 야박하고/전국적 시절인가/살기도 등등하네/만고 영웅 진시황이/천하장사 힘을 빌어/돌도 지고 흙도 져서/만리장성 쌓았구나/황화수는 메웠어도/봉래바다 못 메웠네/동남동녀 싣고 간 배/하루 이틀 아니오네/삼각산에 내린 용설/한양 도읍 학의 형국/무학이 잡은 터에/정도전이 재혈하야/오백년 도읍할제/금수강산 삼천리에/방방곡곡 백성들아/임임 총총 효자 충신/집집마다 효부 열녀/국태민안 시회연풍/국가부영 금자탑을/어서어서 쌓아 보세/만고 불멸 은자성을/이 낭그로 쌓아 주세.

[의의와 평가]

금표 또는 봉표는 전근대 시기에 임업 정책이나 토산물 정책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조선시대 이후부터 유지되어 왔던 봉산들의 소나무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일본인들에게 서서히 벌채되기 시작하였데, 1913년 삼척시 주민들은 일제시대의 소나무 무단 벌채를 막기 위한 사전 조치로 국유 임야측량이 이루어질 때 강하게 저항하는 항일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