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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1074
한자 三陟報本壇과悉直郡王望祭壇碑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유적/건물
지역 강원도 삼척시 당저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40년연표보기 - 삼척김씨 망제단 비 건립
성격 보본단|망제단비

[정의]

삼척 김씨의 시조인 김위옹(金渭翁)을 봉사(奉祀)하는 재사(齋舍)인 보본단(報本壇)보본단 내에 세워진 실직군왕망제단비(悉直郡王望祭壇碑).

[개설]

삼척 김씨의 시조인 김위옹(金渭翁)을 봉사(奉祀)하는 재사(齋舍)인 보본단(報本壇)위옹(渭翁)의 26세손(二十六世孫)인 흥일(興一)이 1838년(헌종 4) 삼척부사 이규헌의 협조로 여러 종친들과 더불어 실직군왕릉과 그 부인묘인 사직릉을 탐방하여 확인한 후, 1840년(헌종 6)에 망제단(望祭壇)과 비(碑)를 세워 매년 제(祭)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증축을 하였으며, 삼척김씨 시조의 재사(齋舍)로서 기능한다.

실직군왕망제단비(悉直郡王望祭壇碑)의 비문(碑文)은 1840년(헌종 6) 1월에 삼척부사로 부임한 이인원(李寅元)이 썼는데, 삼척 김씨의 조상묘인 실직군왕묘가 유실되어 수백년간 제(祭)를 지내지 못하다가 1838년(헌종 4) 삼척부사 이규헌의 협조로 양릉(兩陵)을 탐방하여 확인하고 단(壇)을 설치하여 망제(望祭)를 올리게 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에는 비석을 세우고 사적(事蹟)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김위옹의 후손인 흥조(興祚)·흥일(興一) 등이 부탁하여 쓰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부사 이인원은 이 글에서 김씨(金氏)의 행적이 이씨(李氏)의 행적과 부합하고, 그 또한 삼척 김씨의 외손(外孫)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비석에는 삼척 김씨의 계보는 계림에서 출생한 알지를 시조로 하여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일선군의 아들 위옹실직군왕에 봉해지고, 이로부터 삼척을 관향(貫鄕)으로 하게되었다고 소개하면서 그의 후손들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갈야산의 묘와 성(城)·어정(御井) 그리고 사직의 묘를 실직군왕과 관련하여 소개하였다. 그리고 삼척이 목조의 외향이어서 군(郡)을 부(府)로 승격하고 서대(犀帶)를 하사한 사실을 간략하게 밝히고 있다.

[위치]

보본단실직군왕 망제단비강원도 삼척시 당저동에 있다.

[형태]

비석의 외형은 개석(蓋石)이 지붕형태인 팔작옥개석(八作屋蓋石)이고, 비좌는 거북 문양을 단순한 형태로 조각한 귀부(龜趺)이다. 비각은 ‘모선문(慕先門)’이라 쓴 편액을 걸어 둔 대문 안에 있는데, 비각 주변에는 담장을 둘렀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실직군왕망제단비(悉直郡王望祭壇碑)

기해동십이월여승명수삼척부부지서삼사십리지유노동언유동산언세전목조황고비릉재차간운열성조루□형지이불가봉축지명수호개신지야야사유왈목조구택유허재노동동산지간원초상존지우금촌로전위택기택전황분묘소재호이시추지당시지택어사묘어사서가상상이개구원지막징수의회이불명칙기위자손지천고재한당여하래차지방절흥감척지김역이기원조실직군왕묘지실전장욕설단망제립비기사기손학조흥일등상여징문어여여어차절상제김지정사실부오이지형적우유소감개이황여역척김지외예야기감사근안기보김씨계출계림기시조즉신라대보알지야전이십팔세지경순왕유제팔자휘추봉일선군생자휘위옹삼한벽상공신은청광록대부검교사농경겸어사대부상주국좌승상봉실직군왕실직내삼척구호김지이척위관자차시력기자배륭교위자영대광태사자남지구세손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인궤유녀가감찰어사정석석이녀배천우위장사평창이공숙공숙지녀즉효공왕비시목조배야부지왈갈야산유토성성지중유어정차실직씨지허우왈사직고실직국대저토성지우유일고묘사직지남유일고묘개기분영아아연불사심상봉축이부민□차상전지점양산왈실직군왕릉무혹여배위이이장여후예지거시토자기려불억개분영지막적기유지지혹채세무술추선자사직이궐지구지기견화이지개기비수지제엄연여작중유와□수매이내축칙개석야차옥토성역연□급석이흘병잉구개봉언희관피영역수약가빙구제금석경무소계칙어시호제손상여의왈지지소재유허야고국야기비신적호기지기분산지지재차중칙여기향화지영궐중결운잉지한갈약단□지설제소신상로□감주어허지동월계전수석위단과세일제잉욕이전말각이식지오호목조황비이씨적삼척당태조조이목조외향승군위부지사서대이총지금차김씨우아효공왕비지외외가야여이선파리차지견차인기감이다이금기실묘사□적여노동동산사방불언위후연자기위상감정동의균수망기식천문삽근찬차여우이찬김씨추원보본지성운이(己亥冬十二月余承命守三陟府府之西三四十里地有蘆洞焉有東山焉世傳穆祖皇考妣陵在此間云列聖朝屢□形止而不加封築只命守護盖愼之也野史有曰穆祖舊宅遺墟在蘆洞東山之間垣礎尙存至于今村老傳謂宅基宅田況墳墓所在乎以是推之當時之宅於斯墓於斯庶可想像而盖久遠之莫徵遂疑晦而不明則其爲子孫之千古齎恨當如何來此地方切興感陟之金亦以其遠祖悉直郡王墓之失傳將欲設壇望祭立碑記事其孫學祚興一等相與徵文於余余於此竊想諸金之情事實符吾李之形蹟尤有所感慨而況余亦陟金之外裔也其敢辭謹按其譜金氏系出鷄林其始祖卽新羅大輔閼智也傳二十八世至敬順王有第八子諱錘封一善君生子諱渭翁三韓壁上功臣銀靑光祿大夫檢校司農卿兼御史大夫上柱國左丞相封悉直郡王悉直乃三陟舊號金之以陟爲貫自此始歷其子陪隆校尉自英大匡太師自男至九世孫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仁軌有女嫁監察御史鄭碩碩以女配千牛衛長史平昌李公肅公肅之女卽孝恭王妃是穆祖配也府誌曰葛夜山有土城城之中有御井此悉直氏之墟又曰史直古悉直國大抵土城之右有一古墓史直之南有一古墓盖其墳塋峩峩然不似尋常封築而府民□此相傳指點兩山曰悉直郡王陵無或與配位而異葬歟後裔之居是土者其麗不億慨墳塋之莫的冀遺誌之或採歲戊戌秋先自史直而闕地求之幾見和而止盖其庀隧之制儼然如昨中有瓦□數枚而內築則皆石也次玉土城亦然□及石而訖幷仍舊改封焉噫觀彼瑩域雖若可憑求諸金石竟無所稽則於是乎諸孫相與議曰誌志所載遺墟也古國也豈非信蹟乎旣知其墳山之只在此中則與其香火之永闕重結雲仍之恨曷若壇□之設祭少伸霜露□感逎於墟之東月桂前竪石爲壇課歲一祭仍欲以顚末刻以識之嗚呼穆祖皇妣李氏籍三陟當太祖朝以穆祖外鄕陞郡爲府至賜犀帶以寵之今此金氏又我孝恭王妃之外外家也余以璿派莅此地見此人其感已多而今其失墓事□適與蘆洞東山事彷彿焉爲後衍者其爲傷感情同義均遂忘其識淺文澁謹撰次如右以贊金氏追遠報本之誠云爾)

숭정기원후사경자십월 일(崇禎紀元後四庚子十月 日)

통훈대부행삼척도호부사겸강릉진관병마동첨절제사완산이인원찬(通訓大夫行三陟都護府使兼江陵鎭管兵馬同僉節制使完山李寅元撰)

통정대부행승정원좌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지제교송상래서(通政大夫行承政院左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知製敎宋祥來書)

간사 후손흥일 용구 영원 창주 약려 중화 성언 경문(幹事 後孫興一 容球 英元 昌宙 若礪 重華 聖彦 景文)

[현황]

2018년 현재 보본단(報本壇) 내에 있는 건물과 비석·기문은 다음과 같다.

입구에 있는 솟을삼문은 ‘월계문’으로 ‘보본단’이라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다. ‘월계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주 보이는 건물이 ‘실직군왕묘’로서 실직군왕김위옹을 위한 재각(齋閣)이다. ‘실직군왕묘’의 좌측에 ‘숭모사’와 ‘보대운한각’이 있다. ‘숭모사’는 실직군왕김위옹 부모님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입구의 ‘사주문’을 들어서면 사당이 보인다. ‘보대운한각’은 조선 왕실에서 하사한 홍서대를 보관하고 있는 전각이다.

실직군왕묘’의 우측에 ‘실직군왕망제단비각’과 ‘오정처사사적비각’, ‘보장각’이 있다. ‘실직군왕망제단비각’은 입구의 ‘모선문’을 들어서면 비각이 보이며, 1840년(헌종 6)에 삼척부사 이인원(李寅元)이 쓴 실직군왕망제단비(悉直郡王望祭壇碑)가 세워져 있다. ‘오정처사사적비각’에는 양묘를 찾아내고, 망제단을 만드는 등 공을 많이 세운 오정김흥일의 공적을 소개하고, 그를 기리기 위한 ‘오정처사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보장각’은 족보와 제반 문헌을 보관한 전각이다.

실직군왕묘’의 단(壇) 아래 왼쪽의 건물은 ‘숙재실’ 편액이 걸려있는 ‘추원재’이고, 오른쪽은 ‘저존당’ 편액이 걸려있는 ‘낙선재’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보본단 내의 낙선재와 추원재에는 많은 기문과 상량문들이 있는데, 추원재 내에 걸려있는 기문과 상량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41년(헌종 7) 2월에 후손(後孫) 흥일(興一)이 쓴 『실직군왕망제단기(悉直郡王望祭壇記)』, 1847년(헌종 13) 2월에 강릉인 김용구(金庸九)가 찬(撰)하고 후손 홍간(弘侃)이 쓴 『상량문(上樑文)』, 1847년(헌종 13) 5월 후손 응로(膺魯)가 쓴『보본단창건시전문수렴기(報本壇創建時錢文收斂記)』, 1847년(헌종 13) 12월에 통훈대부행삼척도호부사겸강릉진관병마동첨절제사 서호순(徐灝淳)이 쓴 『실직군왕재사기(悉直郡王齋舍記)』, 1924년 4월에 후손 원익(源益)이 쓴 『추원재중수기(追遠齋重修記)』, 1970년 후손 광수(洸壽)가 쓴 『실직왕묘중건상량문(悉直王廟重建上樑文)』, 1971년 3월에 후손 형석(炯錫)이 쓴 『실직왕묘우중건기(悉直王廟宇重建記)』, 2004년 후손인 규영(圭英)이 쓴 『보본단중수기(報本壇重修記)』가 있다.

낙선재에는 1973년 3월에 후손 형순(炯純)이 쓴 『성의금기(誠義金記)』가 걸려 있다.

그런데, 1971년 형석(炯錫)이 쓴 『실직왕묘우중건기(悉直王廟宇重建記)』에 ‘오정공(梧亭公)이 단기 4053년[1720년(숙종 46)] 경자년에 여러 종친들과 상의하여 실직왕묘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는데, 다른 자료와 비문을 종합해 보면 여기에서 언급된 경자년(更子年)은 1720년(숙종 46)이 아니고, 1840년(헌종 6)의 경자년(更子年)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의의와 평가]

갈야산 기슭의 실직군왕릉사직실직군왕비릉을 확인한 후 삼척 김씨들이 정성을 모아 실직군왕릉을 복원하고 보본단을 건립한 과정과 삼척 김씨의 연원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갈야산실직군왕릉과 함께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와 관련하여 홍서대를 보관한 보대운한각이 보본단 내에 건립되었다는 사실 등은 이 지역에서 삼척 김씨들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유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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