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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659
한자 金圭鎭
영어공식명칭 Kim Gyujin
이칭/별칭 남평,용삼,해강,만이천봉주인,무기옹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근대
집필자 김흥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8년(고종 5)연표보기 - 김규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85년~1894년 - 김규진 중국으로 건너가 8년 동안 수학
활동 시기/일시 1895년(고종 32) - 김규진 평양에서 「조선국평양성도」 그림
활동 시기/일시 1896년(건양 원년) - 김규진 궁내부 외사과 주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7년(광무 11) - 김규진 일본에서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 천연당이라는 사진관 개설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김규진 천연당 사진관에 최초의 근대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 병설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김규진 서화연구회 발족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김규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됨
몰년 시기/일시 1933년연표보기 - 김규진 사망
출생지 김규진 출생지 - 평안남도 중화
성격 서화가
성별
본관 남평
대표 경력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정의]

근대 서화가.

[개설]

김규진의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자는 용삼(容三)이고, 호는 해강(海岡)을 비롯하여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 또는 무기옹(無己翁) 등 많은 별호가 있다. 평안남도 중화(中和)의 농가에서 태어나 외숙인 이희수(李喜秀)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다가 18세 되던 1885년(고종 22)에 중국으로 건너가 8년 동안 수학하였다.

[활동 사항]

청나라에 유학 간 김규진(金圭鎭)[1868~1933]은 북경·양주·상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오창석(吳昌碩)[1844~1927], 서신주(徐新周)[1853~1925], 오대징(吳大澂)[1835~1902] 등 청나라 서화가 및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 민영익(閔泳翊)[1860~1914]과 교류하는 한편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하는 화풍을 연구하였다. 1894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평양에서 「조선국평양성도(朝鮮國平壤城圖)」를 그렸다.

1896년에는 궁내부(宮內府) 외사과(外事課) 주사(主事)로 임명되었다. 이후 내장원 주사, 예식원 주사 및 문서과장, 제도국 참서관, 시종원 시종(侍從), 경리원 기사 등의 관직을 지내고 영친왕의 서법(書法)을 지도하는 서사(書師)에 임명되었다.

1907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하였고, 1913년 천연당 사진관에 최초의 근대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병설하였다. 자신의 서화 작품과 다른 여러 명가(名家)의 작품을 진열하고 판매 및 주문에 응했으며, 고서화(古書畵)도 취급하였다.

김규진이 1915년에 발족한 ‘서화연구회’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에 이어 두 번째 출현한 근대 미술 교육 기관으로, 3년의 수업 과정이었다.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조석진(趙錫晋)[1853~1920], 안중식(安中植)[1861~1919], 오세창(吳世昌)[1864~1953]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타계한 안중식의 뒤를 이어 조석진이 회장이 되자 김규진은 서화협회를 탈퇴하였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자 서예와 사군자부의 심사위원이 되었다.

청나라 유학으로 연마한 대륙 기질의 필력과 호방한 의기(意氣)를 폭넓게 발휘하여 글씨에서는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의 모든 서법에 자유로웠다. 특히 대필서(大筆書)는 당대의 독보 존재로 유명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편액을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삼척 영은사(靈隱寺)에도 「태백산영은사(太白山靈隱寺)」라는 예서체로 된 해강의 편액이 남아 있어 삼척과의 인연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림으로는 글씨에서의 필력이 그대로 반영된 묵죽(墨竹)과 묵란(墨蘭) 등에서 독자 경지를 이루었다. 이뿐만 아니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벽화 「내금강만물초승경(內金剛萬物肖勝景)」과 「해금강총석정절경(海金剛叢石亭絶景)」[1920년] 같은 채색화도 본격 그리기 시작하였다. 산수화, 화조 등 여러 화제도 두루 다루었다. 또 영친왕의 서사(書師)를 맡으며 서화교본으로 제작한 『김규진 화첩』을 비롯하여 서화연구회에서의 서화 교육을 위한 교재로 『서법진결(書法眞訣)』[1915], 『육체필론(六體筆論)』[1915],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1916] 등을 만들기도 했다.

[저술 및 작품]

「조선국평양성도」, 「내금강만물초승경」, 「해금강총석정절경」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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