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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493
한자 陟州先生案
영어공식명칭 Cheokjuseonsaeng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성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855년(철종 6)연표보기 - 『척주선생안』 저술
소장처 『척주선생안』 - 강원도 동해시 송정동
성격 고문서
저자 김구혁
번역자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표제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

[정의]

조선 후기 김구혁삼척부에 재임한 관리 명단과 간단한 이력을 정리한 책.

[개설]

김구혁이 1369년(공민왕 18)부터 1904년(광무 8)까지 삼척부에 재임한 관리 명단과 간단한 이력을 정리한 책이다.

[편찬/간행 경위]

강릉김씨 감찰공파의 김시학(金詩鶴)은 아들이 없자 봉정파 김종집의 3남인 김구혁(金九爀)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김구혁은 1816년(순조 16)에 증조부로부터 책을 물려받아 40여 년 동안 계속해서 썼으니 종이가 오래되고 낡아 흐릿해지고, 연호와 묘호 등이 상세하지 않고 틀린 부분이 많아 1855년(철종 6)에 새 책을 만들어 썼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서 김구혁이 기존의 선생안에 문제점이 있자 전해져 오던 선생안을 새롭게 재작성한 것이다.

[서지적 상황]

원본 1책이며 필사본이다.

[형태]

크기는 세로 21㎝, 가로 15㎝이다.

[구성/내용]

김구혁이 김시학의 양자로 입적하고 새로 작성한다는 서문을 앞에 싣고, 그다음으로 선생안이 시작된다. 선생안은 고려 후기 인물부터 수록되었다. 고려시대 인물은 1369년에 부임하는 현령 정지의(鄭之義)부터 송극공(宋克恭)까지 12명을 다루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의 만호겸지군사 이제(李堤)부터 1904년(광무 8)에 부임하는 군수 정운석(鄭雲晳)[1869~1942]까지 수록하였는데 부임한 관리와 직접 연관이 없는 임금의 죽음이나 전쟁, 양전과 군적을 정리하는 등 중앙사를 함께 언급하였다. 선생안에 소개된 특별한 인물 몇 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402년(태종 2)에 부임하는 군수 김효손(金孝孫)[1373~1429]은 옛터에 죽서루를 중건하였고, 기근이 들자 황희(黃喜)[1363~1452]의 도움으로 백성을 구제하였음을 적었다. 1470년(성종 1)에 부임한 군수 양찬(梁瓚)[1443~1496]은 불에 탄 연근당을 중수하고 죽서루도 중수하였다. 이후 이윤중(李允中)은 석성을 축조하고, 김희삼(金希參)[1507~1560]은 성에 해자를 팠으며, 김효원(金孝元)[1542~1590]은 1578년에 소공대비가 바람에 부러지자 새로 세웠다. 김권(金權)[1549~1622]은 왜구의 침입이 있자 300석을 거두어 경주에 보냈다. 박경신(朴慶新)[1560~?]이 재임할 때는 360호가 떠내려가는 큰 수재가 발생하였으며, 허목(許穆)[1595~1682]은 큰 수해를 보자 동해퇴조비를 세웠다고 했다. 정운주는 어사에 의해 1724년(경종 4) 봉고파직 당하고, 양정호는 영장(營將)과 다투다가 모두 파직되었다. 1730년(영조 6)에 조익명(趙翼命)[1677~1744]은 향청 터에 있던 아사(衙舍)를 지금의 터로 이건했다. 홍명한(洪名漢)[1724~1774]은 전임부사 박사백(朴師伯)·이최중(李最中)[1715~1784]과 함께 자신의 선정비를 마애비로 세우도록 했지만 후임자인 남태저(南泰著)[1709~1774]는 박사백과 이최중의 비를 깎아 없애도록 하였다고 한다. 서노수(徐魯修)는 흉년을 말미암아 어명으로 울릉도 수토를 하지 못하였고, 175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부사들이 호랑이의 피해를 많이 보았다. 1835년(헌종 1)에 부임한 이규헌(李奎憲)은 흉년이 들자 부민들을 구휼하고, 공양왕릉을 보수하였다. 관리로는 드물게 운흥사, 신흥사, 흑악사를 중건하거나 중수하였다. 이 시기에 이규헌·서득순(徐得淳)·조병문(趙秉文)·이휘부(李彙溥) 등은 관리 급여에서 출연하여 구휼하고 있다. 서증보(徐曾輔)가 재임한 1871년(고종 8)에는 성 안에 불이 나서 민가 수백채와 공해(公廨)[관가 소유 건물]가 모두 불에 탔다. 마지막에 수록된 정운석(鄭雲晳)의 전임자인 군수 최윤정은 삼척군수로 2회를 부임하면서 뇌물을 탐하고 돈을 둘러싼 폭정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심하였지만 비석을 세웠음을 애석히 여긴다고 기술하였다.

선생안의 뒤에 「척주지략(陟州誌略)」이라는 항으로 부기되어 삼척의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첨부하였다.

[의의와 평가]

삼척부 부사를 연대 순으로 정리한 평범한 선생안으로 작성되었지만 내용에서 보면 부사의 행적을 비판한 시각으로 정리하였다. 몇가지 사례를 보면 1859년에 부임한 박황진(朴璜進)을 “부임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서 백성 및 향리들과 서로 다투어 그 소문이 경향에 미쳤으니 백성에게 해로움을 끼치는 정치가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고, 1891년에 부임한 신승휴(申勝休)의 경우 “일을 함에 처음은 하는 듯 하다가 끝에는 실적이 없었으니 한탄스러울 뿐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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