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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400
한자 草谷山烽燧址
영어공식명칭 Beacon Fire Station of Mt. Chogoks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초곡리 산2
시대 조선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초곡산 봉수지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초곡리 산2 지도보기
성격 봉수

[정의]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초곡리에 소재하고 있는 봉수터.

[개설]

초곡산 봉수는 초곡 해안으로 침투해 오는 적에 대한 방어와 연락 체계를 갖추어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밤에는 횃불을 들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주요 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 빠르게 알림과 동시에 경비, 통신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한 국방상의 중요한 시설이 있던 곳이었다.

『세종실록』의 「지리지」에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초곡산 봉화 명칭으로 북으로는 양야산에 응하고 남으로는 임원산에 응한다고 하였다. 이후 편찬된 각종 지지의 내용도 이와 유사하다. 그리고 「삼척영진지도(三陟營陣地圖)」[1872년]와 「삼척부지도(三陟府地圖)」[1872년]에 초곡산 봉수가 있던 곳에 ‘봉단(烽壇)’이라 표기하였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따르면 “삼척의 남쪽 약 6리, 초곡리 남동 약 3리 해안의 돌출된 작은 구릉 위에 토루(土壘)와 봉화대지(烽火臺址)가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초곡산 봉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통천의 금란성 봉수(金幱城烽燧)에서 1거 직봉인 회양의 소산 봉수(所山烽燧)와 2거인 영덕대소산 봉수(大所山烽燧)에서 안동의 봉지산 봉수(烽枝山烽燧)로 연결되는 보조 봉수 역할을 한 총 38기의 간봉과 연결되어 있다. 형태와 기능 면에서 해안 지역에 주로 설치된 연변 봉수로 볼 수 있다. 당시 연변 봉수는 단순한 통신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라 자체 방어와 지역 주민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경보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다.

[건립 경위]

1446년(세종 28)에는 봉수의 중요성에 비추어 각도 연변 연대의 축조 법식과 중부 봉화의 배설 제도 등이 의정부의 건의로 1447년(세종 29) 연변연대조축지식(沿邊煙臺造築之式)과 복리봉화배설지제(腹裏烽火排設之制)가 동시에 마련되어 시행됨으로써 연변 봉수의 시설을 구체화해 갖추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 외적 침입이 자주 발생한 삼척 지역 다섯 곳에 연변연대조축지식과 복리봉화배설지제의 지침을 반영하여 연변 봉수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통신 편의와 해안 방어를 위하여 초곡산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심의승(沈宜升)[1788~?]의 『삼척군지(三陟郡誌)』에 “동산(東山) 산 위에 봉화단(烽火壇)의 구지(舊址)가 있으니 신라조에 설치된 것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적이나 유물은 확인할 수 없다. 첫 축조[초축(初築)]은 고려 말~조선 전기로 보이며, 폐지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 삼척 지역에 왜구의 피해가 거의 없었고 북변에 있는 여진족[만주족]이 삼척 지역까지 침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과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 기록된 삼척부사 류시회(柳時會)[1562~?]가 재임하고 있던 1626년[병인년]에 영동 지역의 봉대(烽臺)를 폐지하였다는 기록,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삼척의 봉수는 폐지되었다고 한 기록 등을 종합해 보면 인조 때인 1626년(인조 4)에서 『여지도서』가 편찬된 18세기 중엽 사이로 여겨진다.

[위치]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초곡리 산2번지 일대의 해발 110m인 봉화재 정상부 능선 상에 위치한다.

[형태]

현재 초곡산 봉수는 훼손되어 그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평면 형태는 원형이었다고 여겨지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따르면 토루가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삼척 지역 내 다른 봉수와 같이 방호벽이 설치된 봉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현황]

1970년대 초반인 약 45년 전까지 연대 하단부의 동서 길이 약 6m, 높이 1.5m의 봉수 상단이 파괴된 채 남아 있었지만 군 시설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멸실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1950년대에 원형의 연대가 있었으며, 약 20명의 사람들이 서 있을 수 있는 넓이였다고 한다. 남북 장축능선 위에 원형의 봉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연대가 있던 지형은 동쪽이 바닷가 쪽으로 급경사이고 서쪽은 산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의의와 평가]

현재 봉수 유적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 형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동해안 지역의 연변 봉수 연구 및 분석에 별다른 시사점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러나 초곡산 봉수 위치와 함께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은 동해안 지역의 연변 봉수 연구 및 분석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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