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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392
한자 三陟 永慶墓
영어공식명칭 Samcheok Yeonggyeongmyo Tomb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 270
시대 고려,조선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899년연표보기 - 삼척 영경묘 조성
문화재 지정 일시 1981년 8월 5일연표보기 - 삼척 영경묘 강원도 기념물 제43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2년 7월 12일연표보기 - 삼척 영경묘 사적 제524호 승격
현 소재지 삼척 영경묘 -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 270 지도보기
성격 능묘
관련 인물 양무장군 부인
소유자 문화재청
관리자 삼척시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에 있는 태조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이안사의 어머니 묘.

[개설]

조선 고종 때인 1899년 4월 16일 고종이 태조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 장군의 부인묘를 선조의 묘로 공식 추봉(追封)하여 묘호(廟號)를 영경(永慶)으로 하고, 묘역의 경계를 정하여 비(碑)를 세우며 재사(齋舍)를 건립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준경묘, 해당 묘역(墓域), 재실(齋室), 목조대왕 구거유지(舊居遺址) 등을 묶어 강원도 기념물 제43호[1981년 8월 5일 지정]로 지정·보존되다가 2012년 7월 12일 문화재청 고시 제2012-75호를 통하여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24호로 승격되었다.

목조가 한 도승(道僧)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棺)으로 양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삼척 노동동산에 있는 두 자리의 무덤이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실려 있는데, 고종은 여러 선대 임금들 시기에 일찍이 고쳐 봉토함에 대한 의견이 많았으며 여러 차례 살펴보도록 한 지시도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직접 살피고 온 재상의 보고와, 『여지승람(輿地勝覽)』과 『읍지(邑誌)』에도 역시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 묘에 대한 의식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거행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성하며, 이를 수축할 것을 공식 지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동산의 무덤 이름을 영경묘로 부를 것을 명함으로써 현재까지 이와 같이 불리고 있다.

영경묘의 산형(山形)은 모두 두타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로 내룡(來龍)이 힘이 있고, 혈당(穴堂)이 깊숙하고 조용하며, 좌우가 견고하게 둘러싸여서 국세(局勢)가 웅장하고 뛰어나다. 좀 더 자세하게 영경묘를 살펴보면 좌청룡을 우백호가 끌어안은 형상으로, 산세의 웅위(雄偉)함은 조금 떨어지지만 산이 에워싸고 있어 온화함은 뛰어난 곳이다. 묘소 방향은 묘방(卯方)을 등지고 유방(酉方)을 바라보는 형세이다.

[위치]

영경묘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 270에 있다.

[변천]

영경묘 묘역에 대한 수호 활동이 준경묘가 위치한 활기와 함께 이미 조선 전기부터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삼척 지역과 관련한 각종 읍지나 다음과 같이 지리지에 전하는 양묘 관련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삼척 읍지에 ‘목조(穆祖)의 부친 묘는 부(府) 서쪽 40리인 노동에 있고, 모친 묘는 부 서쪽 30리인 동산에 있다’고 기술된 이래 삼척 지역 향리 출신인 김윤직(金允直) 개인이 보관하고 있던 옛 문서에 1447년(세종 29)에 감사 이심(李審)에게 명하여 분묘가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옛일을 잘 아는 노인 고봉생(高奉生)과 조흥보(曺興寶) 등이 "목조 부친의 묘는 노동에 있고 모친의 묘는 동산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목조 부모 묘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그 구체적인 위치가 삼척부노동동산이라고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위치 확인을 바탕으로 1490년(성종 21)에 강원도에 명하여 봉역(封域)을 수축하도록 하였다가 곧 공사를 중지하라 하였고, 명종대에 감사 윤인서(尹仁恕)의 장계(狀啓)로 매년 봉심하기로 하고 수호군 8명을 정하여 토지 1결(結)을 지급하였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묘역에 대한 수축과 봉심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580년(선조 13)에 감사 정철(鄭澈)[1536~1593]의 장계에 따라 수호만 하라 하였고, 1610년(광해군 2)에 감사 신식(申湜)[1551~1623]에게 명하여 봉심토록 하였으나 노동의 묘가 황지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봉심하는 예가 폐지되었다.

이후 1781년(정조 5)에 감사 김희(金熹)[1729~1800]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봉심하였다고 한다.

감사(監司) 손순효(孫舜孝)[1427~1497]의 양묘기(兩墓記)를 보면 “계유년[1393년(태조 2)]에 어향(御鄕)이라 하여 서대(犀帶)를 군사(郡司)에게 하사하였는데 아름다운 천막을 치고 매년 삼명일(三名日)에 제사를 지내고는 곧 거두어들여 보관하였다.”고 하였다. 즉 조선 전기에는 매년 격식을 갖추어 세 차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낸 제의 장소나 절차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수호군(守護軍)과 관련한 자세한 기록도 이중하(李重夏)[1846~1917]가 정리한 『삼척양묘지』에서 보인다. 이것으로 보아 양묘 수호에 대한 의지는 강했지만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기강이 해이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양묘 수호군의 역할은 양묘 수호, 금화, 금벌이었다고 한다.

1899년 영경묘 수축 이후 수호를 위한 지침은 『수호절목』에 자세히 나온다. 수호군 15명을 두어 제향(祭享), 금화(禁火), 벌초(伐草), 식목(植木) 등의 일을 수행하게 하였다. 조포사(造泡寺)는 흑악사(黑岳寺)로 하여금 두부를 비롯한 제물 준비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 왕실 차원에서 조선 전기 이후 영경묘와 함께 준경묘에 대한 관심과 보호를 지속하면서 묘역 주변에 대한 화전 금지와 나무 보호를 지속하였다. 이로 인해 영경묘와 함께 준경묘 주변의 소나무는 우리나라 고유 수종인 육송[강송, 적송]으로 이뤄진 소나무 숲[수림]으로,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운 원시 자연림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형태]

영경묘는 묘가 안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영경묘로 오르는 별도의 공간에 재각(齋閣), 그 옆에 비각, 묘 앞의 좌우에 수라간과 수호군이 머물 공간, 홍살문, 홍살문에서 재각까지 이어진 신도를 각각 설치하였다. 현재 영경묘에서 수라간과 수호군이 머물 공간은 흔적만 남아 있다.

대부분의 왕릉에는 재각으로 정자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영경묘에는 일자(一字) 형태의 정자각이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건립된 연유는 현장에 다녀온 신하들에게 고종이 “동산의 무덤 자리는 지형이 어떤가?”라고 물으니 이중하가 말하기를 “동산의 무덤 자리는 산 위에 정해져 있으므로 축대 아래에 정자각을 세울 만한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산 아래에 정자각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산 아래에 정자각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하여 다른 지역과는 달리 삼척 영경묘의 재각은 일자(一字) 형태를 띠게 되었다.

[금석문]

영경묘 재각 옆에 영경묘비(永慶墓碑)가 세워져 있다. 광무 3년 7월 11일에 학부대신 민병석(閔丙奭)[1858~1940]을 영경묘 비문 서사관, 영경묘 재각의 상량문 제술관으로 김학진(金鶴鎭)[1838~1917], 서사관으로 윤상연(尹相衍)[1857~?]을 제의하여 각각 임명하였다. 또 비석 제작을 위해 사용하는 돌은 삼척에서 캘 수 있고 돌의 품질이 쓸 만하다고 하여 삼척군수가 기일에 앞서 돌을 캐내 다듬어 놓을 것을 지시하였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동산(東山)이라고도 불리는 이 자리에 목조황비이씨(穆祖皇妃李氏)의 능을 만들었지만 이미 이전에 허목(許穆)[1595~1682]과 정철(鄭澈)[1536~1593]에 의하여 관련 사실이 언급된 바 있음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좌향은 좌묘이향유(坐卯而向酉)로서 산세(山勢)는 웅위(雄偉)에 초손(稍遜)하고 함포온자지봉심(含抱蘊藉之奉審)한 형세라 하였다. 덧붙여서 묘역이 동쪽으로는 구수봉(求壽峯), 서쪽으로는 방우치(方禹峙), 남쪽으로는 다라구미(多羅龜尾), 북쪽으로는 상사전리(上寺田里)에 각각 이른다고 하였다.

비석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형태는 뚜껑돌[개석(蓋石)]이 팔작지붕 형태인 팔작옥개석(八作屋蓋石)이고, 비받침[비좌(碑座)]는 사각형[방형(方形)]의 지대석 위에 사각형의 비받침을 만들어 비신(碑身)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 면〉

대한영경묘(大韓永慶墓)

〈후 면〉

자노동이동십리유왈동산거삼척치삼십리식아목조황비이씨의리지장야좌묘이향유산세지웅위초손이함포온자승지봉심재신이중하소주읍중기전고상신허목위부사시소찬주지서급노동동산이묘기소술고사동백정철도상묘지청수축시말열성조령도신년례봉심금양수호지절일여노동양묘소문헌실적일이가징동지구수봉서지방우치남지다라구미북지상사전동구각이량지척삼천삼백정계립표묘의제치사전시노동오호시거야기어추원보본지의필불가궐언자야유짐소자기감왈식극우열성조소미황자재역불감불도유이성지언(自蘆洞而東十里有曰東山距三陟治三十里寔我穆祖皇妣李氏衣履之藏也坐卯而向酉山勢之雄偉稍遜而含抱蘊藉勝之奉審宰臣李重夏所奏邑中紀傳故相臣許穆爲府使時所撰州誌序及蘆洞東山二墓記所述古事東伯鄭澈圖上墓地請修築始末列聖朝令道臣年例奉審禁養守護之節一如蘆洞兩墓所文獻實蹟一以可徵東至求壽峯西至方禹峙南至多羅龜尾北至上寺田洞口各以量地尺三千三百定界立標墓儀制寘祀典視蘆洞嗚呼是擧也其於追遠報本之義必不可厥焉者也惟朕小子其敢曰式克于列聖朝所未遑者哉亦不敢不圖惟而成之焉)

광무삼년기해십일월일(光武三年己亥十一月日)

정이품정헌대부내부대신부장신민병석봉칙근서(正二品正憲大夫內部大臣副將臣閔丙奭奉勅謹書)

[현황]

1899년 준경묘·영경묘 수축 이후 왕실 차원에서 수호와 제향을 봉행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직 재산으로 관리되어 매년 제향을 봉행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매년 지내던 제향이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따라 숙담 종친이 주도하여 삼척 지역과 인근 지역 종친들을 중심으로 매년 청명제사를 지내다가 1981년 준경묘·영경묘 봉향회가 설립되면서 봉향회가 주관하여 매년 삼척시·강릉시를 비롯한 강원도 지역이 중심이 되고, 서울시와 경상도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온 종친들이 자발 참여하여 4월 20일 양묘에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왕조를 탄생시킨 전주이씨 가문의 정통성과 왕조 개창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중시한 지역은 전주이씨 시조묘를 모신 전주,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목조이안사의 부모 묘인 준경묘영경묘가 있는 삼척, 함경도 의주와 덕원 등 3곳이다.

이 가운데 준경묘·영경묘가 있는 삼척시는 태조이성계 집안의 실묘로서는 가장 오래된 곳으로, 그 역사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또 이곳은 태조이성계의 선조들이 함경도 용주리에서 여진족의 벼슬을 지냈다는 사실을 들어 태조이성계를 여진족의 후예라 여기고, 조선왕조 또한 여진족이 지배한 국가였다고 주장하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여진족 500년설을 비판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조선은 개항을 전후하여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위치 논쟁으로 인해 본격 수축을 미루어 온 목조 부모의 묘역에 대한 대정비가 전주의 조경단·경기전의 중수와 함께 고종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개항 이후 조선 왕조의 유지와 국가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여 국가 중흥의 계기로 삼으려는 고종 황제의 직접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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