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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390
한자 三陟濬慶墓
영어공식명칭 Samcheok Jungyeongmy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준경길 333-360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899년연표보기 - 삼척 준경묘 조성
문화재 지정 일시 1981년 8월 5일연표보기 - 삼척 준경묘 강원도 기념물 제43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2년 7월 12일연표보기 - 삼척 준경묘 사적 제524호 승격
현 소재지 삼척 준경묘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준경길 333-360 지도보기
성격 능묘
관련 인물 양무장군
소유자 문화재청
관리자 삼척시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준경길에 있는 양무장군의 묘.

[개설]

1899년(광무 3년) 4월 16일 고종이 태조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장군의 묘를 선조의 묘로 공식 추봉(追封)하여 묘호(廟號)를 준경(濬慶)으로 하고, 묘역의 경계를 정하는 한편 비를 세우고 재사(齋舍)를 건립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경묘, 해당 묘역(墓域), 재실(齋室), 목조대왕 구거유지(舊居遺址) 등을 묶어 강원도 기념물 제43호[1981년 8월 5일 지정]로 지정·보존되다가 2012년 7월 12일 문화재청 고시 제2012-75호를 통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24호로 승격되었다.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棺)으로 양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삼척 노동동산에 있는 두 자리의 무덤이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실려 있다. 고종은 여러 선대 임금들 시기에 일찍이 고쳐서 봉토함에 관한 의견이 많고 여러 차례 살펴보도록 한 지시도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직접 살피고 온 재상의 보고와, 『여지승람(輿地勝覽)』과 『읍지』에도 역시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도 묘에 대한 의식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거행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성하며, 이를 수축할 것을 공식 지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노동의 무덤 이름을 준경묘로 부를 것을 명함으로써 현재까지 이와 같이 불리고 있다.

준경묘의 산형(山形)은 두타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로서 내룡(來龍)이 힘이 있고, 혈당(穴堂)이 깊숙하고 조용하며, 좌우가 견고하게 둘러싸여 있어 국세(局勢)가 웅장하고 뛰어나다. 대체로 준경묘의 풍수지리에 대하여 좌청룡과 우백호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 형제간의 다툼이 많은 형세라고 하지만 실제 준경묘를 수축할 때 산형에 대하여 상지관(相地官)이 고종에게 무덤 자리는 범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덧붙여 이중하가 “좌우의 산줄기는 꽉 끌어안은 형세에서 그 속이 명당자리로 됩니다.”라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우백호가 좌청룡을 감싸는 일반 지세(地勢)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준경묘 정자각 상량문」에 따르면 준경묘두타산 본줄기에 바로 이어져 있다. 봉황이 춤추고 용이 날아오르는 형상으로, 동산의 곱고 맑은 기운을 바라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서 하늘이 전단(專斷)하고 땅이 화합하니 웅장하다. 별들이 두 손을 마주잡고 모여드는 것 같고, 수목이 울창한 삼봉 산봉우리는 한문(捍門)으로써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으니 하늘이 내려준 것에 사람이 귀의하여 위대한 4명의 왕을 배출한 터라 할 수 있다.

[위치]

삼척 준경묘는 삼척시 미로면 준경길 333-360에 있다.

[변천]

준경묘가 위치한 노동의 묘역에 대한 수호 활동이 이미 조선 전기부터 동산리에 있는 영경묘와 함께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였음은 삼척 지역과 관련한 각종 읍지나 지리지에 전하는 양묘 관련 다음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삼척 읍지에 “목조(穆祖)의 부친 묘는 부(府) 서쪽 40리인 노동에 있고, 모친 묘는 부 서쪽 30리인 동산에 있다.”라고 기술된 이래 삼척 지역 향리 출신 김윤직(金允直)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옛 문서에 1447년(세종 29)에 강원감사 이심(李審)에게 명하여 분묘가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하였는데 옛일을 잘 아는 노인 고봉생(高奉生), 조흥보(曺興寶) 등이 “목조 부친의 묘는 노동에 있고 모친의 묘는 동산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목조의 부모 묘에 관심이 많았으며, 구체화된 위치가 삼척부노동동산이라고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위치 확인을 바탕으로 성종은 1490년(성종 21) 강원도에 명하여 봉역(封域)을 수축하도록 하였다가 곧 공사를 중지하라 하였고, 명종대에 감사 윤인서(尹仁恕)의 장계(狀啓)로 매년 봉심하기로 하고 수호군 8명을 정하여 토지 1결(結)을 지급하였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묘역에 대한 수축과 봉심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580년(선조 13) 감사 정철(鄭澈)[1536~1593]의 장계에 따라 수호만 하라 하였고, 1610년(광해군 2)에 감사 신식(申湜)[1551~1623]에게 명하여 봉심토록 하였지만 노동의 묘가 황지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봉심하는 예가 폐지되었다.

이후 1781년(정조 5)에 감사 김희(金熹)[1729~1800]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봉심하였다고 한다.

감사 손순효(孫舜孝)[1427~1497]의 양묘기(兩墓記)를 보면 “계유년[1393년(태조 2)]에 어향(御鄕)이라 하여 서대(犀帶)를 군사(郡司)에게 하사하였는데 아름다운 천막을 치고 매년 삼명일(三名日)에 제사를 지내고는 곧 거두어들여 보관하였다.”고 하였다. 즉 조선 전기에는 매년 격식을 갖추어서 세 차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의 장소나 절차 등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수호군(守護軍)과 관련한 자세한 기록도 이중하(李重夏)[1846~1917]가 정리한 『삼척양묘지』에 보인다. 이것으로 보아 양묘 수호 의지는 강했지만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기강이 해이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양묘 수호군의 역할은 양묘 수호, 금화(禁火), 금벌(禁伐)이었다고 한다.

1899년 준경묘 수축 이후 수호를 위한 지침은 『수호절목』에 자세하게 정하여져 있다. 수호군 15명을 두어 제향, 금화, 벌초, 식목 등의 일을 수행하게 하였다. 조포사(造泡寺)는 흑악사(黑岳寺)로 하여금 두부를 비롯한 제물 준비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 왕실 차원에서 조선 전기 이후 준경묘와 함께 영경묘에 대한 관심과 보호를 지속하면서 묘역 주변에 대한 화전 금지와 나무 보호를 지속하였다. 이로 인해 준경묘와 함께 영경묘 주변의 소나무는 우리나라 고유 수종인 육송[강송, 적송]으로 이루어진 소나무 숲[수림]으로,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령운 원시 자연림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형태]

준경묘는 묘와 묘 앞에 재각(齋閣), 그 옆에 비각, 묘 앞의 좌우에 수라간과 수호군이 머물 공간, 홍살문, 홍살문에서 재각까지 이어진 신도, 물이 고여 있는 늪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준경묘에서 수라간과 수호군이 머물 공간은 흔적만 남아 있다.

대부분의 왕릉에는 재각으로 정자각이 세워져 있지만 준경묘에는 일자(一字) 형태의 정자각이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건립된 연유는 현장에 다녀온 신하들이 준경묘 아래가 진뻘이어서 정자각(丁字閣)을 세우기 곤란하다면서 수전(水田)과 같은 것은 풍수 보는 관리가 명당이라고 하였지만 묘 앞에서 진뻘까지의 거리는 몇 걸음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에 정자각을 세운다면 불편하게 된다고 보고하였다.

고종은 “그렇다면 ‘일(一)’자 모양의 재각을 간단하게 지어서 제사 지낼 때 넉넉히 행동하게 한다면 좋을 것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은 연유로 다른 지역과 달리 삼척 준경묘의 재각은 일자(一字) 형태를 띠게 되었다 한다.

[금석문]

준경묘 재각 옆에는 준경묘비(濬慶墓碑)가 세워져 있다. 1899년(광무 3) 7월 11일에는 의관(議官) 이근명(李根命)[1840~?]을 준경묘 비문 서사관, 10월 24일(양력)에는 준경묘 제각의 상량문 제술관으로 신기선(申箕善)[1851~1909]과 서사관으로 윤길구(尹吉求)[1853~1906]를 임명하였다. 또 비석 제작을 위하여 사용하는 돌은 삼척에서 캘 수 있고 돌의 품질이 쓸 만하다고 하여 삼척군수가 기일에 앞서 돌을 캐내어 다듬어 놓을 것을 지시하였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노동이라고도 불리는 이 자리에 목조의 능을 만들었는데 이미 이전에 허목(許穆)[1595~1682]과 정철에 의하여 관련 사실이 언급된 바 있고, 이곳이 목조의 외향이어서 부로 승격시키고 서대를 하사하였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풍수지리상으로 무덤 자리는 범이 엎드려 있는 형상임을 소개하였으며, 고종대에 준경묘를 수축하는 과정 및 이와 관련된 내용들을 다소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비석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형태는 뚜껑돌[개석(蓋石)]이 팔작지붕 형태인 팔작옥개석(八作屋蓋石)이고, 사각형[방형(方形)]의 비좌에 비신(碑身)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 면〉

대한준경묘(大韓濬慶墓)

〈후 면〉

삼척치지서사십리유왈노동산자두타이래국세웅위형여복호부신이향을즉아목조황고의리지유장야고상신허목위부사시소저주지서급노동동산이묘기비술고적기언선묘시동백정철도상묘지청수축사심상허정개명신야소언실위확거국초승군위부사서대장지부사열성조명도신년례봉심금양수호구유문헌가고유짐소자사복지삼십유육년기해견재신이중하봉심여구전도지개험잉령정계입표동지기곡서지주봉후남지답곡북지직곡이량지척재지각삼천삼백립제각치관원수직조두지의일의각묘례이행세일사지례오호열성조추원봉선지절미불용기극이흘유미황신지지야절유열성소이루치신언자금가이준봉위금석용시이유시거개소이계술자이역불승광감우시언흘(三陟治之西四十里有曰蘆洞山自頭陀以來局勢雄偉形如伏虎負辛而向乙卽我穆祖皇考衣履之攸藏也故相臣許穆爲府使時所著州誌序及蘆洞東山二墓記備述古蹟其言宣廟時東伯鄭澈圖上墓地請修築事甚詳許鄭皆名臣也所言實爲確據國初陞郡爲府賜犀帶藏之府司列聖朝命道臣年例奉審禁養守護俱有文獻可攷惟朕小子嗣服之三十有六年己亥遣宰臣李重夏奉審與舊傳圖誌皆驗仍令定界立標東至基谷西至主峯後南至畓谷北至稷谷以量地尺裁之各三千三百立祭閣寘官員守直俎豆之儀一依各墓例而行歲一祀之禮嗚呼列聖朝追遠奉先之節靡不用其極而迄有未遑愼之至也竊惟列聖所以屢致愼焉者今可以遵奉爲金石庸是而有是擧盖所以繼述者而亦不勝曠感于是焉迄)

광무삼년기해십일월일(光武三年己亥十一月日)

정이품자헌대부시종원경신이근명봉칙근서(正二品資憲大夫侍從院卿臣李根命奉勅謹書)

[현황]

1899년 준경묘·영경묘 수축 이후 왕실 차원에서 수호와 제향을 봉행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직 재산으로 관리되어 매년 제향을 봉행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매년 지내던 제향이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종친이 주도하여 삼척 지역과 인근 지역 종친들을 중심으로 매년 청명제사를 지내다가 1981년 준경묘·영경묘 봉향회가 설립되면서 봉향회가 주관하여 매년 삼척시·강릉시를 비롯한 강원도 지역이 중심이 되고, 서울시와 경상도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온 종친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4월 20일 양묘에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왕조를 탄생시킨 전주이씨 가문의 정통성과 왕조 개창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중시한 지역은 전주이씨 시조묘를 모신 전주,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목조이안사의 부모 묘인 준경묘영경묘가 있는 삼척시, 함경도 의주와 덕원 등 3곳이다.

이 가운데 준경묘·영경묘가 있는 삼척시는 태조이성계 집안의 실묘로서는 가장 오래된 곳으로, 역사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또 이곳은 태조이성계의 선조들이 함경도 용주리에서 여진족의 벼슬을 지냈다는 사실을 들어 태조이성계를 여진족의 후예라 여기고, 조선왕조 또한 여진족이 지배한 국가였다고 주장하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여진족 500년설을 비판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조선은 개항을 전후하여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위치 논쟁으로 말미암아 본격 수축을 미루어 온 목조 부모의 묘역에 대한 대정비가 전주의 조경단·경기전 중수와 함께 고종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개항 이후 조선 왕조의 유지와 국가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서 나름대로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여 국가 중흥의 계기로 삼으려는 고종 황제의 의지의 직접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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