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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이보혁 휼민유애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349
한자 觀察使李普赫恤民遺愛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 갈령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상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34년(영조 10)연표보기 - 관찰사 이보혁 휼민유애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84년(숙종 10) - 이보혁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62년(영조 38) - 이보혁 사망
현 소재지 관찰사 이보혁 휼민유애비 -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 갈령 지도보기
성격 선정비(善政碑)
양식 원수형(圓首形)
관련 인물 이보혁(李普赫)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78㎝×69.5㎝×16.5㎝

[정의]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에 있는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 이보혁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

[개설]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 이보혁(李普赫)[1684~1762]이 선정(善政)을 베푼 덕을 기리고자 1734년(영조 10)에 세웠다. 이보혁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이다.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원(聲遠)이다. 좌의정 이세백(李世白)[1635~1703]의 재증손이다.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벼슬길에 올라 평양부윤이 되었다가 1725년(영조 1) 부정 혐의로 관직이 삭거되었다. 그 뒤 성주목사로 기용되었다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이 일어나자 우방장으로 영남에서 기병한 정희량(鄭希亮)[?~1728]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었으며, 인평군(仁平君)에 봉하여졌다. 1731(영조 7)~1733년(영조 9)에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다. 1733년에 동의금·호조참판을 거쳐 1736(영조 12)년 병조참판을 지내고, 1738년(영조 14)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로 있다가 남형을 한 죄로 파직되었다. 1740년(영조 16) 풍덕부사가 되어 군액과람의 폐를 시정하였고 이듬해 한성부좌윤에 전임되었다. 1748(영조 24)년에 부총관(副摠管), 1753년(영조 29)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그 이듬해에 공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위치]

관찰사 이보혁 휼민유애비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갈령산(葛嶺山) 정상부에 위치한다.

[형태]

비석은 뚜껑돌[개석(蓋石)] 없이 비신(碑身)과 비좌(碑座)로 구성되어 있다. 비의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원수형(圓首形)이고, 비신 받침은 사각형[방형(方形)]이다. 비의 전면 중앙에는 ‘관찰사이공보혁휼민유애비(觀察使李公普赫恤民遺愛碑)’라고 새겨져 있고, 그 좌우로 간략한 선정 내용이 적혀 있다. 후면에는 비의 건립 연월일을 새겨 놓았다. 비의 규모는 높이 178.0㎝×너비 69.5㎝×두께 16.5㎝이다.

[금석문]

전면:관찰사리공보혁휼민유애비 산제소대 택랄황공(觀察使李公普赫恤民遺愛碑 山齊召臺 澤捋黃公)

후면:옹정십이년갑인삼월 일 수(雍正十二年甲寅三月 日 竪)

[의의와 평가]

관찰사 이보혁 휼민유애비는 조선 후기 문신 이보혁이 강원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선정을 베푼 내용을 살필 수 있는 금석문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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