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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유 향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95
한자 新舊儒鄕戰
영어공식명칭 Conflict between New and Old Yurim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청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3년연표보기 - 신·구유 향전 발발
성격 사건

[정의]

근대 삼척 지역의 구 유림과 신 유림 간 갈등.

[역사적 배경]

향전(鄕戰)은 기존에 향촌을 지배해 오던 재지사족(在地士族)[조선시대 향촌사회에 머물러 있던 지식계층]과 사회·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흥 세력 간에 향권 장악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립을 말한다. 신 유림 측에서는 유림(儒林) 명단에 함께 올려서 차별이 없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구 유림 측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데서 서로 간 분쟁이 발생하였다.

[경과]

1903년(고종 40) 삼척 향교에서 김헌경[1851~1910]·최세현(崔世顯)·심진하(沈鎭河)·정창화(鄭昌和)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구 유림 계통과 김동호(金東鎬)·장석홍(張錫鴻)·김현구(金顯球)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 유림 계통 사이에 신·구유 분당(新舊儒 分黨)의 시비인 이른바 향전이 발생하였다.

삼척 지역의 신·구 유림 분쟁은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1906년(고종 43) 7월에는 군수 정운석(鄭雲晳)이 신·구유 향전을 조정하려다 파직되었다. 1907년(고종 44) 정월에는 군수 안기환(安玘煥)이 뇌물을 받고 구유(舊儒)는 유림(儒林)이라 하여 명단에 올리고 신유(新儒)들은 사림(士林)이라 하여 명단에 함께 올렸다가 7월에 파면되었다. 이때 최신현(崔信顯)은 최태만(崔泰萬)을 시켜 역대의 임사록(任士錄)을 죽서루 남쪽에서 태워 없애도록 하였다. 또 1908년 11월 군수 박래영(朴來榮)이 신구유 명단을 함께 올려 등록한 이른바 유사통록(儒士通錄)이 죄에 저촉되었다면서 피죄(被罪)[죄를 입음]되자 유림들이 간사한 범죄자를 잡겠다며 소동을 일으켰으며, 이에 박래영은 도망을 갔다. 그 후 김헌경의 조정으로 분쟁은 일시 잠잠해 지는 듯하다가 김헌경이 터무니없는 일로 고소를 당해서 1910년(순종 3) 5월 5일 서울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향리에서 유사 2명과 당군 4명을 보내 시신을 모셔 온 뒤 크게 장사를 지냈다. 그 후 1910년 한일병탄이라는 국난을 당한 후 신·구유 분쟁은 흐지부지되었다.

[결과]

1910년 한일병탄 후 신·구유 분쟁은 흐지부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삼척 지역의 전통 재지사족과 새롭게 성장한 신흥 세력 간 분쟁으로, 당시 삼척 지역의 사회상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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