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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046
한자 天主敎
영어공식명칭 Catholic Church
이칭/별칭 가톨릭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강원도 삼척시
집필자 심일종

[정의]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강원도 삼척 지역에 보급된 그리스도 교파의 하나.

[개설]

천주교의 공식 명칭은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 또는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이다. 천주교라는 명칭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이전에 중국에서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에 의하여 가톨릭의 신앙 대상인 하느님(God)이 천주(天主)로 번역되면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 가톨릭은 서학(西學), 서교(西敎), 천주학(天主學), 천주공교(天主公敎) 등으로 불리다가 천주교로 정착하였다. 현재는 가톨릭, 카톨릭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천주교 신앙은 절대자이자 창조자인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한다. 천주교 신앙인들은 창조자 하느님이 하늘 및 땅과 천사 및 인간을 창조했으며, 진실하고 영원하며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믿는다.

[한국의 천주교 전래 과정]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약 2세기 전의 일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인 1784년에 이승훈(李承薰)[1756~1801]이 중국북경에서 프랑스인 신부 장-조제프 드 그라몽(Jean-Joseph de Grammont)[중국명 梁棟材]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돌아온 때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서학(西學)으로 불렸으며, 주로 양반계층에서 수용되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뒤 이미 서학에 조예가 깊은 이벽(李檗)[1754~1785]과 권일신(權日身)[1742~1791]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 세 명은 한국 천주교의 세 초석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전래된 천주교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신해박해는 조상에 대한 제사 문제 때문에 발생하였다. 윤지충(尹持忠)[1759~1791]과 권상연(權尙然)[1751~1791]이 북경 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의 위패를 불살랐다가 이 때문에 관헌에게 체포되어 고문 끝에 처형되었다. 이것이 한국 순교사의 첫 장이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는 당시 벌어진 정쟁과 관련이 깊다. 남인 세력의 중진이던 이가환(李家煥)[1742~1801], 권철신(權哲身)[1736~1801], 이승훈, 정약종(丁若鍾)[1760~1801] 등을 포함해 30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 교난과 관련하여 잘 알려진 역사 사건이 황사영(黃嗣永)[1775~1801]의 백서사건(帛書事件)이다. 황사영은 교회를 구하기 위하여 북경 주교에게 호소문을 보냈다가 이것이 발각됨으로써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는 한국 교회 사상 최대 비극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보수파가 서양의 침략 세력과 서교를 동일시함으로써 천주교도 학살이라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병인박해 이후로 3년 동안 학살된 교인 수가 8000명이 넘는다. 이러한 박해를 ‘교난(敎難)’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천주교는 1882년에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과 1886년 프랑스와 체결한 조불수호조약(朝佛修好條約) 등에 의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다.

[한국의 천주교 변화]

천주교 신앙은 한반도에 예언자 성격의 신앙, 인권의 평등 사상, 정신상의 윤리사상을 이식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사상이 근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기본 이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천주교 전래 초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사상이 사회 개혁이나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여러 차례의 교난이 신자들에게 내세지향형이며 영혼의 구원에 더 치중하는 경향을 낳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천주교 신도들이 침묵을 지킨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현실 문제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삼척의 천주교]

삼척에서는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가 살았는지 불분명하지만 경상북도 울진에 살고 있던 김강이(金綱伊)[1755~1815, 세례명 시몬]가 1815년 을해박해 때 원주에서 옥사한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강원도동해안 남부지역에서도 신자들이 숨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삼척 천주교의 효시인 성내동 성당은 1946년 강릉본당 삼척공소로 출발한 후 1949년 본당으로 창설되었다가 1957년 현재의 성내동으로 이전하였다. 1961년 11월 성요셉병원을 설립하고 1980년대까지 삼척을 비롯한 원근 지역 주민들의 건강 진료에 전력함으로써 사회 선교 활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97년 현재 삼척시지에 소개된 천주교회 및 공소는 5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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