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034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of Samcheok Provinc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강원도 삼척시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2년(파사이사금 23) - 실직국이 사로국에 항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468년(장수왕 56) - 고구려에게 신라의 전략 거점인 실직성이 함락 고구려 영토에 편입
특기 사항 시기/일시 505년(지증왕 6) - 실직주 설치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
특기 사항 시기/일시 556년(진흥왕 17)연표보기 - 실직군으로 개편
특기 사항 시기/일시 757년(경덕왕 16) - 삼척군으로 개명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의 역사시대 전반에 대한 개관.

[삼국시대 및 남북국시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각 처에 정치제가 출현할 때 삼척 지역에는 실직국(悉直國)이 존재하였다. 이 실직국은 한반도 중부 동해안 일대에서 해상권을 장악하고 교역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실직국이 102년(파사이사금 23)에 신라[사로국]에 항복함으로써 삼척 지역은 신라의 북쪽 변경지대가 되었다.

이후 5세기에 들어와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실시되면서 468년(장수왕 56) 2월 신라의 전략 거점인 실직성(悉直城)이 함락되었다. 삼척 지역을 확보한 고구려는 실직군(悉直郡)을 설치하고 하슬라주(何瑟羅州)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삼척 지역은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6세기 초 지증왕대에 다시 고구려로부터 삼척 지역을 되찾았다. 신라는 505년(지증왕 6)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이 실직주는 신라가 최초로 지방에 설치한 주로, 영역을 띠는 광역의 주 성격보다는 군주가 거느리는 군단 소재지로서의 정(停) 의미가 강하였다.

한편 512년(지증왕 13)에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로서 우산국을 정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직, 즉 삼척에 있던 주치(州治)가 하슬라[강릉]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24년(법흥왕 11)에 건립된 ‘울진신라봉평비’에 실지[실직] 군주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512년과 524년 사이 어느 시기에 하슬라로 이동한 주치가 다시 실직으로 이동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어쩌면 실직주를 폐지하지 않고 존속시킨 채 하슬라주를 새로 설치하고, 이사부를 하슬라주 군주로 임명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실직주 군주는 삼척 지역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울진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또 하슬라로 이동한 주치가 다시 실직으로 돌아 온 이후에는 강릉 지역까지 관할 범위 안에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실직군주 밑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인 실지[실직] 도사(道使)가 있었다. 도사는 5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556년(진흥왕 17)경에 삼척 지역은 실직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진흥왕대의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신라의 영역이 강릉 이북 지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삼척 지역의 군사 중요성이 다소 감소됨에 따른 행정 단위 조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와 말갈의 북쪽 국경 침입이 지속되자 신라는 658년(태종무열왕 5)에 강릉의 북소경(北小京) 폐지와 아울러 주(州)를 설치하고 도독(都督)을 두어 진수(鎭守)함과 동시에 삼척에는 북진(北鎭)을 설치하였다. 이후 삼척 지역은 하서주(河西州) 도독 관할 아래의 실직군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북진이 설치됨으로써 신라 동북쪽 변경의 전략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직군은 757년(경덕왕 16)에 주·군·현을 개혁할 때 삼척군(三陟郡)으로 개명되었다. 당시 삼척군에는 죽령현, 만경현[또는 만향현], 우계현, 해리현 등 4개의 영현(領縣)이 있었다. 그 후 신라 하대에 들어와 김주원(金周元)이 명주 군왕에 봉해지자 삼척 지역은 김주원 가문의 식읍(食邑)이 되어 이들 가문의 실질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삼척 지역에도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 세력이 있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삼척 지역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읍격이나 구역의 변동 없이 여전히 삼척군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995년(성종 14)에 지방제도를 대개편할 때 삼척군은 읍격 조정과 함께 읍명 개정이 이루어졌다. 즉 읍격이 그때까지의 군(郡)에서 주(州)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서 읍명도 이전의 삼척에서 척주(陟州)로 개칭되었다. 이처럼 읍격이 군에서 주로의 승격이 이루어진 것은 성종이 주현제를 실시하면서 군 단위 행정 구역을 없애기 위해 군·현 단위의 읍 가운데 필요한 곳을 주로 승격시켰기 때문이었다. 당시 척주는 10도 가운데 삭방도(朔方道) 소속이었다.

그 후 1018년(현종 9) 지방 조직을 군정 성격에서 민정 성격으로 개혁할 때 척주는 읍명이 다시 삼척으로 환원되고, 읍격도 주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이처럼 삼척현(三陟縣)으로 강등됨으로써 이후 지방관도 현령(縣令)이 파견을 나오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장관인 현령 이외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으로 8품인 현위(縣尉)가 한 명 더 있어서 현령을 행정 보좌하였다. 이와 함께 그때까지 삼척 관할이던 우계현(羽溪縣)이 떨어져 나가 명주로 이속되었다. 이렇게 개편된 삼척현은 이후 동계(東界)에 소속되어 안변도호부 병마사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변경 지역인 동계의 외관에는 군사 성격이 강한 방어사(防禦使), 진사(鎭使), 진장(鎭將) 등이 파견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동계 소속인 삼척 지역에 현이 두어지고 민사 성격의 현령이 파견된 것은 삼척 지역이 변경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척현은 그 후 14세기 중엽까지 별다른 개편 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그동안 삼척현의 소속 관계에만 변동이 있었을 뿐이었다. 즉 몽골 침입으로 사실상 동계가 해체되어 가자 1309년(충선왕 1) 명주에 강릉도(江陵道)가 신설됨으로써 이후 삼척현은 강릉도 소속이 되었다.

그런데 14세기 후반, 즉 공민왕 말엽과 우왕 초반에 삼척현에는 현령 대신 안집중랑장(安集中郞將) 세 명이 연달아 파견되었다. 이 안집중랑장은 공식 지방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안집사(安集使)의 임무를 띠고 파견된 임시 관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당시 동해안에 빈번하던 왜구의 침입 때문에 임시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삼척현은 1377년(우왕 3)에 다시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지방관도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게 되었다. 이 읍격의 승격은 당시 왜구의 빈번한 동해안 침략으로 삼척 지역 군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1384년(우왕 10) 삼척포진에 처음으로 만호(萬戶)를 두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는 1393년(태조 2) 삼척이 자신의 4대 조인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1274]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삼척군에서 삼척부(三陟府)로 읍격을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하였다. 이와 함께 삼척을 강원도의 계수관(界首官)으로 지정하였다. 이로써 삼척은 명실 공히 강원도 지역에서 중심이 되는 대읍이 되었다.

그러나 삼척부로의 승격은 왕실과의 특별한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합당한 기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태종 대에 들어와 읍격을 인구 수의 다과와 토지 면적의 넓이를 기준으로 하여 합당하게 개편할 때 삼척의 읍격도 재조정되어 1413년(태종 13)에 삼척부에서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로 강등되었다. 이에 따라서 도호부사(都護府使)에는 종3품 관원이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후 삼척도호부는 조선말까지 별다른 개편 없이 지속되다가 1895년(고종 32)에 삼척군(三陟郡)으로 개편되어 강릉부 소속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에 다시 강원도 소속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삼척도호부의 하부 행정 구획으로 리(里)와 면(面)이 있었다. 당초 부내·노곡·장생·미로·북평 등 5개 리가 있었지만 1630년(인조 8) 당시 부사 이준(李埈)[1560~1635]이 매곡, 덕번, 소달, 박곡 등 4개 리를 신설하여 총 9개 리가 되었다. 그 후 숙종 대에 리를 면으로 개칭하고 아울러 장생을 상장과 하장, 덕번을 근덕원덕, 북평을 도상과 도하로 각각 분리 신설하여 총 12개의 면이 되었다.

한편 군사제도를 보면 육수군(陸守軍)의 경우 1457년(세조 3) 진관 체제가 성립될 때 삼척에는 거진(巨鎭)이 설치되어 제진(諸鎭)에 속한 울진과 평해를 거느렸다. 그러나 1467년(세조 13) 삼척진이 강릉진관에 소속됨으로써 도호부사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임하는 제진으로 격하되었다.

수군의 경우 삼척포진은 고려 말 이후 만호 진영으로 존속해 오다가 1468년(세조 14)에 첨절제사 진영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진관 체제 아래에서 삼척포진의 수군첨절제사는 삼척진관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안인, 고성, 울진, 월송 등 4개 포진(浦鎭)의 만호를 통솔하였다. 그 후 삼척포진 첨절제사는 1672년(현종 13)에 영동지방을 관장하는 영장(營將)을 겸임하고, 1673년(현종 14)에는 영동지방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였다.

[근대 이후]

삼척도호부는 1895년 지방 관제 개혁 때 삼척군으로 개명되었다. 그 후 삼척군은 1914년에 부내·말곡[매곡]면을 합하여 부내면이라 하고, 도상·도하·견박곡면을 합하여 북삼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가운데 부내면은 1917년 삼척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8년에 삼척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삼면도 1945년에 북평읍으로 승격되었다. 또 1961년 1월 1일 상장면이 장성읍으로 승격되고, 1963년에는 소달면도계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73년에는 장성읍 황지리가 황지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980년에 북평읍이 동해시로 편입되고, 1981년에는 장성읍과 황지읍이 태백시로 분리되었다. 또 1986년에는 삼척읍이 삼척군에서 분리되어 삼척시로 승격되었다. 그 후 삼척군은 1995년 삼척시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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