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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008
한자 東海-海上王, 異斯夫
영어공식명칭 East Sea King Isab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512년 (지증왕 13) - 우산국 정벌
성격 무관

[정의]

신라 내물왕 4대손으로, 동해의 섬나라 우산국을 정벌한 삼국시대 신라 장군이자 정치인.

[개설]

이사부는 지금의 울릉도인 고대 섬나라 우산국을 정복함으로써 동해의 해상왕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이다. 바다는 우리 민족이 탁월한 기상을 펼치던 무대였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바다를 정복하는 것은 곧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서 우리나라의 각 바다에는 그 지역을 장악한 해상왕이 있었다. 서해의 해상왕 장보고는 우리나라 해양 진출의 영웅이었다. 남해의 해상왕 이순신은 우리나라 해양 수호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동해의 해상왕 이사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바다로 진출한 해양 진출의 원조이었다.

[이사부의 생애]

이사부(異斯夫)는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17대 내물왕의 4대손이다. 당시 지증왕이 내물왕의 증손이며 법흥왕이 내물왕의 4대손임을 고려하면 이사부는 신라 왕족 가운데 핵심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이사부라 칭하는 것이 일반 형태이지만 태종(苔宗)으로 불리기도 하고 삼국유사에는 이종(伊宗), 단양적성비에는 이사부지(伊史夫智)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성씨는 신라의 왕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김씨(金氏)이지만 당시에는 성씨를 사용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성씨를 붙이지 않고 이사부라고 불렀다. 지(智)는 이름 뒤에 붙은 존칭으로, 오늘날의 ‘씨(氏)’나 ‘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사부는 신라가 비약 발전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지증왕은 503년(지증왕 4)에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확정하고 대외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당시 이사부는 이에 부응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대외로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사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505년(지증왕 6)에 실직주(悉直州) 군주(軍主)에 임명되는 것이다. 실직주는 지금의 삼척으로, 신라가 주군현(州郡縣)의 지방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할 때 가장 먼저 주가 설치된 곳이다. 주(州)는 중앙의 정예 군단인 정(停)이 주둔하는 최전방의 전진기지이며, 군주(軍主)는 정예 군단인 정을 통솔하면서 지역의 군정과 행정을 총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처럼 이사부가 신라 최초의 주인 실직주의 군주로 임명된 것은 신라가 동해안 지역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삼척을 동해안 진출의 전진기지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증왕은 7년 후인 512년(지증왕 13)에 주(州)를 실직에서 지금의 강릉인 아슬라(阿瑟羅)로 옮기고 이사부를 아슬라 군주로 삼았다. 아슬라는 본래 예국(濊國)의 고도(古都)로, 고구려 때는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로 불렸다. 그리고 20대의 젊은 장수 이사부는 불복하는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를 정복하였다. 원래 우산국은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지리상의 이유로 신라에 귀복하지 않고 있었으며,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복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이사부는 계교(計巧)를 써서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만든 사자(獅子)를 전선(戰船)에 잔뜩 실은 뒤 우산국 해안을 내왕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여 마침내 우산국 사람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법흥왕이 즉위하면서 정적 관계에 있던 이사부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그러나 진흥왕이 즉위하자 이사부는 정치 실세로서 상당한 대내외 활동을 전개하였다. 법흥왕의 대를 이은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랐다. 이 때문에 왕태후가 섭정을 하였으며, 이사부는 정치 실권자로서 국정의 중요 업무를 수행하였다. 법흥왕대의 칩거에서 벗어난 이사부는 20여 년 동안 진흥왕을 보필하며 신라의 영토 확장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이 같은 군사 업무 이외 일반 정치 분야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사부는 541년(진흥왕 2)에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정치·군사 부문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사부는 545년(진흥왕 6) 진흥왕에게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왕의 정통성 확보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사(國史)를 편찬해야 한다며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진흥왕은 대아찬 거칠부(居柒夫)[?~579] 등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진흥왕 11)에는 1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함락하고 3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점령하는 등 양국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사부는 이 틈을 이용하여 이 두 곳을 공략해서 점령한 뒤 성을 증축하고 군사 1000명를 주둔시켜 성을 지켰다. 이어서 금현성 탈환을 위하여 재차 침입한 고구려 군대를 다시 격파한 뒤 고구려군을 추격해서 크게 승리하고 개선하였다. 그리고 김유신(金庾信)[595~673]의 할아버지 무력(武力)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지역을 경략(經略)하여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

이사부는 화랑도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풍월주(風月主)를 통하여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화랑도가 시행되기 이전에 미남들을 뽑아 풍월주라 부르는 화랑제도와 유사한 낭도 조직을 운영하였다. 이사부는 탁월하고 참신한 인재 등용을 통하여 군사 조직을 확충하였다. 이는 신라가 정복 활동을 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데 핵심 역할을 하였다.

마침내 이사부는 화랑 사다함(斯多含)과 함께 562년(진흥왕 23)에 대가야를 공격하여 정벌하였다. 9월에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사부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때 사다함이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전단문(栴檀門)에 치달아 백기를 세우니 성중의 모든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본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처럼 이사부는 나이 20대이던 지증왕대에 우산국 정벌을 통하여 신라가 동해안의 패권을 차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60~70대 나이였던 진흥왕대에는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정벌하여 신라 영토를 대폭 확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사부는 신라 왕족으로서 출중한 무예와 지력를 바탕으로 신라가 눈부시게 도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과 삼척]

이사부우산국 정벌은 신라의 동해안 장악이라는 의미와 함께 해상 진출이라는 의의가 있다. 당시 우산국은 작은 섬나라였지만 강력한 해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산국은 당대에 어느 나라보다 바다에서 떨치는 힘이 막강했고, 우산국의 왕 우해왕(于海王)은 바다를 육지처럼 주름잡고 휘저으며 다닐 정도로 용맹스러운 해상왕(海上王)이었다.

이사부는 512년에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우산국 정복 기사에 따르면 이사부는 강력한 해상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던 우산국을 힘보다 계략으로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사부는 나무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싣고 가서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들을 풀어 놓겠다”고 위협하였다. 울릉도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당시 사자의 입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여 우산국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서 희고 큰 깃발을 투구바위에 올려 놓고 항복한다는 표시로 나발을 울렸다. 이사부는 나무 사자 한 마리를 울릉도에 두고 갔는데 그것이 화석이 되어 골개 앞의 사자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사부우산국을 점령하기 위하여 출항한 항구는 삼척항이었다. 이사부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512년으로, 그해는 이사부가 아슬라 군주가 된 해였다. 아슬라는 지금의 강릉을 말한다. 이를 근거로 이사부우산국을 정벌할 때 출항지가 강릉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사부우산국 정벌을 위하여 출항한 곳은 실직, 곧 삼척이다. 이는 역사·지리 여건으로도 분명하게 입증된다.

신라가 505년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동해안 지역에 대한 군사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512년에는 주를 실직에서 아슬라로 옮기고 이사부를 아슬라 군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해 이사부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신라가 주를 실직에서 아슬라로 옮기면서도 군사 조직인 정(停)의 주력 부대는 실직에 잔존시키고 하급자를 별도의 실직 군주로 임명하여 아슬라 군주 이사부의 통솔을 받게 하였다. 이는 신라가 아슬라를 동해안 지역의 행정 중심 도시로 실직을 군사 중심 도시로 각각 특화시키면서 하나의 체계로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행정 중심 도시 아슬라와 군사 중심 도시 실직의 관계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삼척은 동해안 해상 교통로를 독점 확보, 지배할 수 있는 최적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해양 진출 기지로도 적합한 데다 방어망 구축에도 용이한 곳이었다. 삼척은 대규모의 신라 군선이 정박할 수 있는 넓은 자연 항구와 함께 백두대간을 배후에 두고 있어서 선박을 건조하고 무기 등 해전에 필요한 도구 제작에 유리한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신라 군사가 주둔하고 있던 성곽인 오화리산성(吾火里山城)[고려시대에는 요전산성(寥田山城), 조선시대에는 오화리산성(吳火里山城)으로 표기됐다.]은 신라가 삼척에 실직주를 설치하던 초기에 조성된 산성으로, 동해안 지역 군사 거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산성의 입지와 규모는 주변의 다른 산성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났다.

삼척은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여 항해는 물론 울릉도 지역을 목표로 삼아 항해하기에 적절한 곳이다. 백두대간에 올라서면 육안으로 울릉도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육지의 여타 지점 가운데에서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울릉도를 향해 항해하는데 가장 유리한 지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산국 정벌의 의의]

이사부우산국 정벌 의의는 우산국이 일찍부터 우리 영토였음을 역사로 말해 주는 것이다.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로 우리나라와 일본이 마찰을 빚고 있는 현실에서 이사부우산국 정벌은 가장 중요한 역사 의미를 지닌다.

독도는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부터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산국은 오늘날 울릉도, 독도 등을 포함하는 도서 지역과 그곳을 둘러싼 바다를 장악하고 지배한 해상 국가였다. 우산국이사부가 512년에 정복함으로써 이들 지역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영토가 되었다. 이에 따라서 이사부우산국 정벌독도 영유권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사부우산국 정벌은 일찍이 우리나라가 해양 강국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인 우리나라는 바다가 곧 우리나라가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로 기능한다. 일찍이 우리나라는 바다를 통해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진취의 기상이 강하였다. 서해의 해상왕으로 불리는 장보고는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하여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신라, 당나라, 일본을 잇는 해상교통로를 장악하였다. 남해의 해상왕 이순신은 우리나라 해양 수호를 통해 나라를 구원한 영웅이다.

이사부는 우리나라 바다를 상징하는 동해의 해상왕이다. 우리나라 동해는 21세기에 들어와 유럽의 지중해처럼 중요성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급변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중심에 서 있는 곳이 바로 동아시아이며, 그 중심이 바로 동해이다. 독도를 둘러싼 분쟁은 동해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일찍이 동해를 장악한 이사부의 활약상은 우리나라가 동해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사부가 동해 해상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척시는 명실상부한 이사부의 도시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하는 한편 이사부의 개척 정신과 얼을 이어받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7년에는 삼척시민 주도로 ‘이사부장군기념사업회’를 창립시켰으며, 2008년부터는 매년 ‘삼척 동해왕 이사부 역사문화축전’을 개최하고 있다. 2009년에는 이사부 국가표준영정 조성 사업을 추진하여 2011년에 국가표준영정 제83호 지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삼척시는 신라 장군 이사부의 개척 정신과 얼을 이어받은 가족형 테마공원 ‘이사부 사자공원’을 조성하였으며, ‘이사부 테마파크’를 구상하여 추진하고 있다. 이사부 테마파크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독도와 동해 침탈 야욕을 분쇄하고, 우리의 독도를 중심으로 하는 해양 영토 수호 의지를 보여 줄 수 있는 교육 현장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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